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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귀의 예술
피에르 토마 니콜라 위르토 지음, 성귀수 옮김 / 유유 / 2016년 7월
평점 :
일상생활의 한 행위지만, 친구 사이라도 자랑스럽게 떠벌릴 수 없는 것이 있다면 바로 방귀다. 당연한 생리 현상이지만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쉽게 방귀는 뀌는 장면을 목격한 적이 있는가? 하루에 사람은 평균 3번이상 방귀는 뀌는 게 정상이라고 하지만 하루종일 친구와 같이 있어도 친구가
방귀뀌는 걸 경험하기란 쉽지 않다. 현대 사회에서 타인 앞에서 방귀를 뀌는 행위는 매우 모욕적이거나 불쾌한 일로 느껴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나의
불편함을 해소하고자 남에게 폐를 끼칠 수 없는 게 마땅한 예의다. 도저히 방귀를 뀔 수 없는 경우에는 그냥 참고 만다. 이처럼 방귀는 예의의
마지막 제한선이거나 타인과의 벽을 담당하는 장벽의 표시로 느껴진다.
그러나 몸은 때때로 생각과 다르다. 지금이 아니면 안돼! 라는 강력한 경고로 복부를 불룩하게 만들어낸다. 또 너무 참아서 병이 된 사람도
실제로 발생한다. 방귀의 역할은 건강의 적신호를 시사하는 것까지 포함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방귀는 차마 입에 올리기 싫은 부끄러운 것이다. 그걸
재미있고 해학적으로 연출한 사람이 있었다. <방귀의 예술>의 저자 피에르 위르토였다.
그는 남들이 기피하는 방귀를 아주 철저히 분석하는 치밀함을 선보인다. 방귀란 것은 자연이 희구하는 건강일 수도 있고, 기술을 통해 얻어지는
희열과 쾌감일 수도 있다라고 방귀의 예술을 천명하기 시작한다. 다만 건강과 양식에 반하는 그 어떤 방귀의 목적에 대해서도 단호히 부정하는 입장을
고수하면서 분별 있게 예술의 영역을 제한하니. 방귀는 예술이 아니다라고 말하기가 참으로 애매해졌다. 예의를 지키는 방귀를 연구하겠다는 피에르의
주장이 사뭇 진지하면서 우스꽝스럽게 느껴지는 건 나의 착각일까.
"밥을 먹으면서 방귀 뀌는 사람은 죽을 때 악마를 본다"라는 프랑스 속담이 있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예의범절을 가르치기 위해 전해
내려오는 말이다. 그만큼 방귀를 삼가는 태도는 우리의 의식, 무의식에 뿌리 깊다. 숨기고 싶은 것, 삼가야 할 생리적 현상을 의학과 철학 나아가
예술의 관점에서 재조명하고 그 가치를 적극 옹호하겠다는 발상에는 과연 18세기 계몽주의적 웰빙 사상의 영향이
뚜렷하다.
<방귀의 예술>을 번역한 번역가의 말이다. 뭔가 굉장히 좋은
말을 해주려고 노력한 듯 보이나 중요한 말에서 맞춤법이 틀리는 불상사가 나오는 바람에 그 뜻이 격하되는 참사가 일어났다. (이 글은 자체 수정한
것이다.) 어찌되었든 간에 문명과 관습에 얽매이기보다는 자연과 자유를 따르겠다는 심오한 뜻이 담겨있다고 한다. 내 방귀에 심오한 뜻이 담겨 있다
생각하면 어쩐지 더 지독해지는 기분이다.
<방귀의 예술>은 방귀가 갖는 사회적 역할과 정치적 일화,
방귀의 종류까지 보는 이의 엉덩이를 움찔하게 만드는 정보들을 담고 있다. 모르고 살아도 별 문제 없는 '방귀'에 대한 지식이지만, 그렇게 따지면
인문학은 모두 모르고 살아도 되는 것들로 치부되는 것이 아닐까?
'방귀'라는 소재를 누가 이토록 자세히 분석하려고 노력했겠는가? 방귀가
가진 사회적 의미가 있다고 누가 알았을까?
'방귀'에 담긴 편견을 깨부수고 체계적인 이론생리학을 보여주겠다는 마음이
알차게 담긴 <방귀의 예술>은 고맙게도 아주 얇다. <방귀의 예술>의 인기에 대해서 책은 이렇게 말한다. 분명 '웃음의
책'이지만 방귀 또한 인간의 정신을 매료하는 예술이 될 수 있다는 해학적인 주장이 휴머니즘의 메세지에 닿아 있다고. 인간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매력적인 인문학을 떠올린다면 <방귀의 예술>을 떠올리지 않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