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섬 앞바다 한국문학사 작은책 시리즈 5
홍상화 지음 / 한국문학사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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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내내 4년 전 심야영화로 보았던 「은교」를 떠올렸다. 은교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그 아름다움을 탐하고자 하는 늙은 시인 이적요가 그려졌다. 그는 자신의 외적인 늙음을 한탄하면서 은교의 젊음에 사랑을 느끼는 인물이나 나는 그가 자신을 늙었다고 생각했을 때부터 그의 정신이 늙어갔다고 여기게 되었다. 그는 '늙음'이라는 도피처를 찾아 자신을 내버렸다. 그리고 「범섬 앞바다」의 정훈을 만났다.




 

 아! 그때로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나도 모르게 탄식이 터져 나왔다. 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창작 인생이 끝났음을 예감했다. 소설의 좋은  소재가 될 만한 경험이나 느낌이 내 의식 속에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잠재의식 속에 숨겨

 져 있는 그 무엇을 끄집어내는 고통을 감당할 의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새로운 소재가 될 수 있는 경

 험을 찾아 나설 만큼 나의 문학적 열정이 치열한 것도 아니었다.

정훈은 다른 의미로 이적요처럼 쇠락을 느끼는 사람이다. 자신의 예술가로서의 생명이 끝났다는 걸 느끼며 시체처럼 살아갈 앞으로의 자신에 대한 한탄으로 몸부림치는 남자다. 모든 일상이 재미없어졌고, 세상을 냉소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참을 수 없는 것은 그런 자신조차 꼴보기 싫다는 것이다. 그러던 중에 미국에서 한국문학을 취재하러 온 마이크 무어가 연락을 한다. 마이크 무어는 정훈을 만나 한국문학이 점점 자신의 방향성을 잃어가고 있다고 비판한다. 정훈은 그 표류함이 자신에게도 흘러나오고 있음을 안다. 그 와중에 마이크는 어떤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한 눈에 반했는데 그 여자야 말로 진정한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다고 자신하는 것이다. 대충 말을 맞춰 줄 생각으로 정훈이 꺼낸'죽음과 연애하는 어느 동양 여자'라는 소재에 그는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마이크 무어의 기이한 사랑에 영향이라도 받을 걸까. 정훈은 그 이후 그 여자가 있는 곳을 자주 찾아가면서 그 여자에게 천천히 잠식당한다.


그는 사라져 가는 소설가로서의 생명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 여자를 볼 때마다 느껴지는 알 수 없는 감정 속에서 헤엄치고 있다. 나는 그가 명확히 소설을 쓰고 싶은 건지 사랑을 하고 싶은 건지 말할 수 없다. 다만 소설을 쓰기 위해 사랑을 하고, 사랑을 하기 위해 소설을 쓰게 되었다는 표현이 그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지루한 인생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그는 소설을 써야했고, 사랑을 해야했기 때문이다. 남들이 다른 방식으로 삶과 싸우는 동안 그는 그만의 방식으로 싸워야 했다. 그게 소설이라는 대상으로 비춰진 것이다. 
 
그런데 막상 사랑을 하려고 보니 문제가 생겼다. 그는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니란 걸 스스로 깨달은 것이다.

그랬다. 정말로 그랬다. 나는 그동안 사랑을 모르면서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것처럼 사랑 이야기를 지껄여왔다.

그리고 사랑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질문을 해왔고, 그럴 때마다 나름대로 답을 얻었었다.

문제는 거기에 있었다. 사랑이 무엇인지 묻는다는 사실이 사랑을 해본 적이 없다는 증거였다.

사랑을 하면 그것이 무엇인지 묻지 않게 되어 있다. 그것은 문자와 언어를 초월하는, 서술하거나 경험할 수 없는 아주 성스러운 것으로, 극소수의 행운아만이 경험할 수 있는 희귀한 느낌이기 때문이다.

 
그는 사랑을 하고 싶어하는 여자를 만족시켜줄 남자가 못 되었다. 그는 사랑을 하는 법을 몰랐다. 그래서 그녀의 애정을 얻었을 때 그녀의 일기를 보았다는 커다란 비밀을 털어놓은 것이다. 그녀의 전 애인은 운동가 출신의 남자로, 같은 일을 하는 동료를 불지 않기 위해 스스로 자해를 해 얼굴을 일그러뜨린 인물이었다. 그 흉칙한 얼굴에 그녀는 뜻모를 배신감을 느낀다. 자신을 사랑했다면 스스로의 몸도 아꼈을 것이라고, 그 뜨거운 불에 지지는 순간까지 그녀를 떠올리지 않았다는 데서 그녀는 슬픔을 느꼈을 것이다. 그 어떤 것보다 그를 우선시하고 사랑하는 여자와 달리 그는 더 큰 목표를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종착역인 사람이 아니었다. 혜진, 그녀는 자신의 죽음으로 전 애인에게 복수하고자 한다.

소크라테스가 '인간은 자신이 부족한 것을 사랑하게 되어 있다.'라고 말했을 때 그의 말에 박수를 보냈었다. 자신의 짝의 장점이 자기 것이 되고, 그러면 그 장점을 사랑할 수 없기에 결국 사랑이란 격정은 지속될 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완연히 그녀를 사랑하게 된 정훈은 그녀의 모든 것을 차지하려고 한다. 사랑을 모르는 정훈은 사랑을 할줄 아는 혜진에게 끌려 자신을 변화시키려 했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죽어가는 자신이 새 생명 태어나듯 발현될 수 있으리라 믿었던 마음인지도 모른다. 그는 사랑 앞에서 솔직했고, 그 솔직함이 파멸을 불러왔다. 전 애인에 관해서 그녀의 일기를 통해 알아냈다는 사실을 해서는 안 되었다. 밝히고 싶지 않은 비밀을 폭로당했을 때, 그녀는 또다시 사랑이 무너질 수 있다는 걸 인식했기 때문이다. 사랑에 상처를 입어본 사람은 겁쟁이가 된다. 약하고 겁많은 사람은 자신이 상처받기 전에 모든 관계를 끝내려 한다.

혜진과 헤어지고 난 뒤 그녀를 잊으려고, 그 사랑을 잊을 방법을 찾으려고 애쓰던 그는 죽어갔다. 그는 그녀 안에서 자신이 부족한 것을 발견했기에 그녀를 사랑하게 된 것이었다. 그와 같이 될 수 없었기에 그의 사랑을 무너졌다. 

개인적으로 주인공인 정훈이 혜진을 못 잊어 죽는 걸로 끝나기를 바랬는데, 그는 그녀에게 상처를 치유하도록 도와준 범섬 앞바다에서 자신을 치유한다. 영원히 죽지 않을 사랑을 하면서 그는 새로운 생명을 마음 안에 피웠다. 

정말이지 문장 하나하나가 어찌 이리 몸을 떨리게 하는지. 사랑을 이토록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는 표현력을 갖춘 작가에게 존경을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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