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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의 자코메티 - 예술과 예술가들 3
제임스 로드 지음, 오귀원 옮김 / 눈빛 / 2000년 10월
평점 :
품절
아침에도 차가운 봄비는 그치지 않았습니다. 빗속을 걸어 자코메티를 만나러 가는 것도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수와 태는 미술관에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전시를 준비한 코바나컨텐츠는 이번에도 브레송의 사진을 포함해 풍부한 기록 사진과 영상, 텍스트로 자코메티의 생애를 따라가며 작품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큐레이션 해 놓았더군요.
모든 것은 사라져도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이 바로 '시선'이라는 자코메티의 말처럼, 그의 작품에서 그의 시선을 찾아내는 것이 재미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야나이하라 흉상>을 특히 재미있게 살펴봤습니다.
자코메티는 제임스 로드의 초상화를 그리는 동안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피곤하지 않다고, 루브르 박물관에 가서 조각이나 그림을 보는 대신 사람을 보기 시작하면 작품은 하나도 보지 못하고 나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나도 <로타르 좌상> 전시실 의자에 앉아 잠시 숨 돌리는 동안, 작품을 보는 사람들의 얼굴과 모습을 지켜봤습니다. 사람들이 작품에 열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이 어렵지 않더군요. 그리고, 그의 아버지 지오반니 자코메티가 어린 자코메티에게 일러준 말을 조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화가란 제대로 볼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고 미술을 공부한다는 것은 곧 보는 법을 배우는 것이란다." 그러고 보면 나는 사람들을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대상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교감하지 않고서 그를 이야기하려고 서툴게 서둘렀던 것이지요.
<걷는 사람>은 무척 기대가 컸습니다. 따로 마련한 어두운 전시실에 들어서자 '그'가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그'의 주위를 한 바퀴 돌며 막대한 걸음걸이 하나하나를 새겼습니다. 늪처럼 그를 끌어당기는 발바닥의 인력을 온 힘을 다해 뿌리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나는 일어섰다. 그리고 한 발을 내디뎌 걷는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리고 그 끝이 어딘지 알 수는 없지만, 그러나 나는 걷는다. 그렇다, 나는 걸어가야만 한다."
굳은 의지의 표정만 남고 온몸이 촛농처럼 녹아내리는 구도자 같던 <로타르 좌상>이 '마침내' 일어나 걸어가는 것 같았습니다. 혹은 이 <걷는 사람>이 그 모든 길을 걷고 걸어서 '마지막'에 이르러 신 앞에 무릎 꿇은 모습이 <로타르 좌상>일 것이라고도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살아가는 일을 이유 없이 그만두어야 할 때가 오겠지요. 욕망이 나의 눈을 가려 삶을 이끌었다면 인생은 허망하고 덧없는 꿈이었음을 탄식하리라 한동안 주저앉아 있었습니다.
자코메티가 어깨에 손 얹고 말 걸어 주었습니다. "우리는 실패하였는가. 그렇다면 더욱 성공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잃었을 때, 그 모든 걸 포기하는 대신에 계속 걸어나아가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좀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의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만약 이것이 하나의 환상 같은 감정일지라도, 무언가 새로운 것이 또다시 시작될 것이다. 당신과 나, 그리고 우리는 계속 걸어나가야 한다."
밖에는 여전히 부슬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빗속을 걸어가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