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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의 과학적 한계 - 의문화 1
에드워드 골럽 지음, 예병일.신좌섭 외 옮김 / 몸과마음 / 2001년 6월
평점 :
품절
유사한 질문을 다른 분야에서 던져 보자. 우리는 자동차업계에 무엇을 기대해야 하나? 아마 사람들은 더 싸고, 안전하고, 연료를 적게 소모하는 자동차가 개발되기를 기대할 것이고, 자동차 회사들도 이러한 차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의학에 무엇을 기대해야 하나? 당연히 의학이 인간을 질병없이 오래 살 수 있게 해주기를 바랄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얼마나 오래 살 수 있게 해주어야 할 것인지, 또 질병없이 산다는 것은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인지에 대한 일반적인 합의는 없는 것 같고, 이러한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진 바도 없는 듯 하다. 이 점에 대해서 이 책의 저자도 그 동안 의학의 목표와 한계가 한 번도 제대로 검토되어진 적이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하여 우리사회의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무엇인가에 따라 우리사회의 공공자원을 구체적으로 어떤 의과학 연구에 투자할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실제적인 측면에서는 새로 개발된 치료법을 의료보험 적용항목으로 채택할 것인지, 이미 자발적인 호흡이 없는 환자를 인위적으로 살려 놓아야 하는지 등의 질문에 대한 대답도 우리사회가 가지는 의학의 목표와 한계에 대한 결론에 따라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앞에서 던진 <우리는 의학에 무엇을 기대해야 하나?>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의학이 가지는 과학적인 한계를 근현대의학의 발전사를 통해 결론 짓고 있다. 여기서 결론지어지는 의학의 목표는 우리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무병장수나 만병통치약과는 거리가 멀다.
의학사를 살펴보면 최고의 성공은 급성 감염성질병의 퇴치에서 이루어졌다. 산업화와 이에 따른 위생의 개선, 그리고 의학이 제공한 항생제와 백신에 의해 현대의학은 급성 감염성질병을 매우 효율적으로 퇴치했고 그 결과 인간의 평균기대수명은 급격히 증가했다. 그러나 이제는 만성 비감염성질병이 문제가 되고 있다. 이러한 질병은 인체내부 균형의 문제이고 대부분 인체의 노화에 따라 발생하는 질병이다. 저자는 이런 질병들에 대해서 증상을 완화시키고 진행을 늦추는 등 완치보다는 삶의 질을 높이려는 것이 현대의학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다시 말해서 급성 감염성질병에 대해서는 완치란 개념이 존재했지만 만성 비감염성질병에 대해서는 관리란 개념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질병에 대응하는 이 두 가지 다른 방식에 대해 <페니실린 양식>과 <인슐린 양식>이라는 이름을 각각 붙이고 있다.
혹자는 이러한 저자의 주장에 대해 동의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거의 매일 신문과 방송에서 치매유전자를 발견했느니 당뇨병의 새로운 발생 기전을 규명했느니 하는 의학의 발전에 대한 기사를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뉴스거리가 실천적인 치료의학의 발전에 기여하는 바는 그리 크지 않다고 단언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질병에 대한 지식이 증가하여 진단기술은 발전하고 있으나, 치료법에서는 그다지 큰 진전이 없는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저자는 이러한 진단법과 치료법 사이의 괴리를 단순하게 설명하고 있다. 즉 어떤 사실을 안다는 것과 그것에 대해 어떤 행동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단순한 명제를 무시하는 현대의 의과학자들이나 과학기자들에 의해서 지나친 의학에 대한 낙관주의가 일반인들에게 널리 퍼져 있는 듯 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한 가지 우려했던 것은 이 책이 서양의학의 시각에서 서양의학의 과학적 한계를 지적한 책으로, 대체의학자나 사이비의학자들에 의해 자기네들의 의학이 이런 서양의학의 한계를 극복하고 보완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용될 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실제로 대체의학이나 사이비의학이 주로 초점을 맞추는 질병도 만성 비감염성질병들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현대의학의 한계를 지적하고 이에 맞는 합리적인 의학의 목표를 설정하자고 주장하는 것이지, 대체의학이나 사이비의학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