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염병의 문화사
아노 카렌 지음, 권복규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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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다시피 전염병('감염병'이란 말이 더 좋을 것 같기는 하지만)은 세균이나 바이러스에 의해 사람에게 발생하는 질병이다. 그러므로, 전염병의 유행이나 그 특이한 양상은 전염병을 일으키는 당사자인 세균이나 바이러스의 특성에 의해서 결정되어지리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일까? 인간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요소가 다 그렇듯이 전염병도 사회의 다른 구성요소로부터 동떨어져 독립적일 수는 없다. 즉, 한 사회의 역사적, 문화적 특성이 그 사회에 어떤 전염병이 발생하고 유행할 지를 결정하고, 또 반대로 전염병에 의해서 사회가 변화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이 다소 생소하다고 생각될 지도 모르겠지만, 전염병과 사회간의 상호작용은 역사를 통하여, 또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도 볼 수 있다. 실제로 역사 교과서에서도 사회 변화의 주요 동인으로 자주 거론 되는 것이 전쟁, 기근, 그리고 전염병을 말하는 역병이다. 그리고, 앨프리드 크로스비는 그의 저서 <생태제국주의>에서 유럽인에 의한 아메리카 대륙과 오스트레일리아 대륙 정복에 전염병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잘 보여 주고 있다. 또한, 최근의 SARS라는 신종 전염병의 전세계적 발생은 대형 여객기라는 현대의 교통수단이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책은 인류의 탄생으로부터 현재 시점에 이르기까지의 인류의 역사를 전염병과의 연계 속에서 살펴보고 있다. 즉, 농경문화의 도입, 도시화, 산업혁명 같은 인류 삶의 형태 변화에 의해 전염병의 유행이 어떻게 영향을 받았는지, 또 반대로 전염병의 유행에 의해 인류의 삶이 어떻게 영향을 받았는지를 방대한 인류의 역사 속에서 찾아내어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를 배우고 들으면서 이런 전염병의 영향을 간과해 와서인지 이 책에서 소개되는 내용과 시각이 낯설 수도 있다. 하지만 전염병도 인류 생활의 일부분이었고 사람의 삶과 죽음을 결정할 수 있는 문제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 책의 저자가 역사라는 무대에서 전염병에게만 너무 강한 조명을 비추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책에 대한 이전의 리뷰를 보면 번역에 대한 불만이 있는 글을 볼 수 있는데, 나의 경우에는 별 불만 없이 책을 읽어 갈 수 있었다. 다만 한글로 번역된 제목이 좀 어색하다는 느낌은 있다. 영어 원제인 Man and Microbes와 책의 내용을 고려했을 때, '전염병과 인류의 역사'가 어울리지 않았을까 싶다.(하지만 역자를 이해한다. 왜냐하면 윌리엄 맥닐에 의한 유사한 시각의 저술인 Plagues and Peoples가 이미 '전염병과 인류의 역사'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있기 때문이다.)

덧붙여 이 책의 한 가지 단점은 이 책의 주제 자체에서 비롯된다. 이 책이 소설이라면 주요 등장인물들은 콜레라, 결핵, 매독 등의 전염병들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요 등장인물들의 성격에 익숙치 않은 일반 독자들로서는 이 책이 주는 재미가 다소 줄어들지 않을까 싶다.

혹자는 이러한 전염병과 인간 사회간의 상호작용의 역사는 과거의 일이고, 이제는 인류의 역사가 전염병의 영향에서 벗어났을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유용한 항생제와 백신으로 인해 현재의 우리는 전염병으로부터 어느 정도 방어 받고 있으므로 이런 생각은 타당할 수도 있다. 하지만, AIDS에 의해 사하라사막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이 쇠퇴하고 있고, 생물학전이나 테러에 대비해 노력을 투자해야 하는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아직 전염병으로부터 자유롭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전염병의 문화사>는 지금도 진행되고 있고 미래에도 그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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