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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NA 독트린
리처드 르원틴 지음, 김동광 옮김 / 궁리 / 2001년 3월
평점 :
품절
리처드 르원틴은 생물학계에서 독특한 존재이다. 극단적 환원주의와 생물학적 결정론이 지배하는 현대 생명과학계에서 그는 이에 반하는 논리를 꾸준히 내세우는 소수파 학자이다. 어떠한 분야에서건 기존 주류 세력에 대한 반대 논리는 그들의 투쟁을 위해 대개 비논리적인 색채를 띄기 쉬움에도 불구하고, 그는 항상 합리적인 논거를 내세워서 자신의 논리를 편다. 이것이 그의 저술에서 볼 수 있는 가장 멋진 점이다. 지금까지 한국어로 번역된 그의 저서 중 나는 “우리 유전자 안에 없다”, “3중나선”, 그리고 “DNA 독트린”을 읽었는데, 지금 소개하는 “DNA 독트린”이 가장 명쾌하고 종합적으로 그의 생각을 표현해주는 책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면 르원틴과 주류 생명과학자들의 사고방식에서 가장 차이가 나는 점은 무엇일까?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주류 생명과학자들의 사고방식을 한마디로 표현하는 단어는 극단적 환원주의와 생물학적 결정론이다. 보다 근원적인 차이는 주류 생명과학자들은 복잡한 자연법칙을 허용하지 않는데 있다. 보통 과학자들은 단순 명료한 자연의 법칙을 선호한다. 누군가에 의해 제시된 자연법칙이 매우 복잡할 때는 평가를 하기도 전에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 이런 과학자들의 특성이 물리학이나 화학과 같은 분야에서는 합당할지 모르겠지만, 생명과학의 분야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시각의 차이가 르원틴과 다른 주류 생명과학자들을 가르는 근본 경계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면에서는 또 다른 외로운 생물학자였던 매클린톡의 사고방식과의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그녀의 전기 “생명의 느낌”을 보면 알 수 있다).
어떤 독자들은 “이데올로기로서의 생물학”이라는 이 책의 한글판 부제이자 원래 영문판 제목에 반감을 가지기도 할 것이다. 왜냐하면 객관적이고 가치중립적이어야 할 과학이 이데올로기라는 비객관적인 요소에 의해 영향을 받아야 한다고 저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르원틴의 주장은 정반대다. 과학은 그 토대가 되는 사회의 이데올로기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반대로 과학의 발전은 다시 그 이데올로기의 구축에 일조를 하기 쉽다는 것을 인정하고, 객관적인 과학을 위해서 노력하여 이를 극복하자는 점에 르원틴의 주장이 있다. 즉 르원틴의 시각에서는 현재 주류 생명과학자들은 이데올로기의 방향은 반대지만, 사회주의 소련 시대에 사회주의 사상을 뒷받침하는 유전학 이론을 주장했던 리센코의 복사판인 것이다. 이러한 과학의 내재된 문제점에 대한 르원틴의 처방은 합리적인 회의주의(reasonable skepticism)이다.
이 책은 그리 분량이 많지는 않다. 하지만 다른 책들과 함께 읽는다면 그 재미는 두 배가 될 수 있다. 다른 르원틴의 저서들은 물론이거니와 4장의 인간게놈 프로젝트 비판은 이블린 폭스 켈러의 “유전자의 세기는 끝났다”와 함께 읽으면 좋을 것이고, 5장의 사회 생물학 비판은 사회 생물학의 주창자인 에드워드 윌슨의 “사회 생물학”이나 이를 쉽게 설명하는 다른 책들과 함께 읽으면 좋다. 또, 르원틴과의 대담이 수록된 “과학의 정열”(루이스 월퍼트)도 그의 생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한 가지 흠은 번역 과정에서 명백한 오역이 눈에 띈다는 것이다. Human genetics (인간유전학)을 생물공학으로 오역하는가 하면(p63-64), 낭포성 섬유증(cystic fibrosis)은 섬유종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데도 이렇게 해설하고 있다(p117).
생명과학의 중요성이 점점 커지고 있는 이 때에, 인간게놈 프로젝트나 현대 생명과학의 성취와 전망에 대한 책을 읽어 본 독자에게 균형 잡힌 시각을 위하여 이 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