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침 묵 ♧
발행일 : 1990년 6월 1일 지은이 : 르 클레지오 옮긴이 : 김화영 펴낸곳 : 세계사 책정가 : 4,500만원 I S B N : 8933830138 [절판 또는 품절]
1。 내가 죽으면 나를 알고 있었던 이 대상들은 더이상 나를 증오하지 않게 되겠지。 나의 내부에 있는 내 생명이 꺼져버릴 때、 내게 주어졌던 이 통일성을 내가 마침내 흩어버리게 될 때 소용돌이는 중심을 바꿀 것이며 세계는 그 자체의 존재방식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긍정과 부정의 대결、 소란、 빠른 움직임、 압박들이 이제는 더이상 허용되지 않을 것이다。 시선의 차디차고 불타는 흐름이 멈추게 될 때、 긍정하면서 동시에 부정하던 저 숨은 목소리가 말하기를 그치게 될 때、 흉물스럽고 고통스러운 이 모든 소란이 잠잠해질 때、 세계는 간단하게 이 상처를 되아무릴 것이며、 부드럽고 한가한 새 살의 층을 넓혀갈 것이다。 더이상 과거의 잠재적 나를 초월하여 가기 위한 무슨 상처자국도 추억도 그 무엇도 남지 않게 될 것이다。 나는 여행하지 않으리라。 나는 이제 현실의 천을 찢는 일을 그만 둘 것이며 내 의식의 충동은 마치 우스꽝스러운 새 울음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듯이 문득 잊혀져버릴 것이다。 촘촘하고 검은 상보는 툭 떨어져버릴 것이고、 나는 그게 떨어지는 지도 모를 것이다。 나는 이기도록 생겨먹지 않았다。 나는 지탱하기에 너무나 센 전류를 받아서 버쩍 달아오른 가는 줄、 사물의 모서리들을 비치고자 하다가 스스로 타버리는 가는 줄에 지나지 않는다。 그 줄이 끊어지고 장님이 세상을 지배하게 될 때 개개의 대상은 계속하여 옛날의 그것이 될 것이며 내 어떠한 시선도 그것을 창조할 수 없어질 것이다。 여러 해들、 여러 세기들을 초월하여、 현실적인 거리를 초월하여、 나를 초월하여、 앞도 뒤도 아닌、 원인도 결과도 아닌、 절대로 그 인간이 아닌 채。 나는 벌써 나의 무력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나는 나의 상상불가능 속에서 포기해 버렸다。 나는 벌써 제거되었고 박탈되었고 공허에로 넘어갔다。 나는 벌써 죽었다。 그렇다。 살아 있기 위해서 내가 한 모든 몸짓마다 수천번 죽었다。 ♧ 침묵 1장 전문(全文)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