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은 가을도 봄
이순원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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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천은 가을도 봄 / 이순원 | 이룸



  어쩐지 소설이지만, 작가 본인의 유신시대의 대학시절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긴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허구냐 아니냐로 갈래를 따져보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 이 이야기는 그 자체가 또 하나의 현실이라는 생각이다. 작가로서 살아생전에 쓰고 싶은 작품이 있지만 그 중에선 '반드시 써야만 하는 작품'도 있을 법하다. 작가 이순원은 <춘천은 가을도 봄>을 탈고하면서 마음의 짐을 내려놓은 느낌이 들지 않았을까 싶다. 그 시대를 함께 했을 법한, 하지만 가슴에만 남았던 사람들을 이제야 하나씩 하나씩 꺼내어 이야기해볼 마음이 생긴 것이었을까? 2020어디쯤에서. 

  70년대의 유신시절의 무거운 시대적 배경을 깔고 있지만, 나는 한 세대를 비껴나간 독자다. 나는 그 시간들이 하나의 흑백사진처럼 남겨진 것을 보는 수밖에 없고 쓸쓸한 기분이 든다. 그 쓸쓸함을 무사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젊은 날 기억 저편의 빛바랜 사진첩을 열어보는 일은 누구에게나 은밀하고 아름답다. 당시로는 더없는 어둠이었어도 돌아보면 그것이 바로 우리 청춘의 가장 꽃다운 시절처럼 여겨지는 한 장 한 장 추억의 물증과도 같은 사진이 내게도 여러 장 있다. - 159쪽

  화자가 부정하고 싶은 사회적 기득권층의 가족내력과 배경, 그리고 그 안에서의 당숙의 존재, 화자가 만났던 지인들의 아픔은 결코 유신이라는 시대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사가 시대가 낳은 또다른 아픔도 있었다. 바로 채주희라는 인물이다.  
  
  ‘생각하면 자꾸 슬픈 마음이 들어. 진호 씨처럼 돌을 던지며 사랑할 진정한 조국을 갖지 못했다는 게. 엄마 때부터 숙명처럼 겪어온 모멸감이. 어쩌면 그것이 이 땅에 던져진 나의 원죄가 아닌가 싶어.’ -  340쪽

  채주희는 흔히 말하는 소위 '양공주'의 자식은 소위 '튀기'라는 인종비하적인 발언을 들으며 살아야 하는 태생이다. 유독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씌우는 프레임들이고 그 유례도 다른 세계에서는 찾기 힘들 정도다. 이런 슬픈 숙명론을 가진 채주희는 진호라는 남자를 만나지만 소설은 진호의 시각에서 바라봐지는 객체였다. 하지만 마지막에 채주희가 한국을 떠날 때 화자에게 남긴 편지에서는 '진호처럼 돌을 던지며 사랑할 진정한 조국을 갖지 못한' 자신이 진호를 바라보며 느끼는 서글픈 주체였음을 깨닫게 해준다. 
  또 한 사람. 당숙은 시인이다. 시는 약자의 편이다. 하지만 시가 아우르지 못하는 더 어둡고 습한 영역, 그 음지에서 사는 사회적 최약자들은 여전히 작가의 시대적 회고에서 다 말해질 수 없는 미결된 과제로 남는 것 같다. 미결된 상태에서 지금은 찾을 수도 없는 사라져간 영원한 약자들을 어떻게 아우를 수 있을까. 그저 그들의 이름을 불러보는 일, 그들의 이야기를 반추하고 다시금 생명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직종은 다름 아닌 작가가 아닐까. 그래서 화자 혹은 작가는 소설가의 길을 택하지 않았을까.
  이렇게 생각하면 앞서 말한 작가가 지었던 '마음의 짐'의 이유가 어느정도 풀릴 법도 하다. 


  - 마치며. 
  요즘처럼 모호하고 문체와 사물을 앞세운 젊은 작가 소설의 유행 속에서, 그 소설들에 겨우 익숙해진 나는 그저 그 모호함을 조용히 견뎌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해석이 다 나와있고, 모호함의 여지조차 없는 이 장편을 대하면서 오히려 낯설어하는 나를 보며 당황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어찌 그렇게 성급한 잣대를 들이댔는가 싶다. 아무리 지난 이야기의 회고형식을 가지고 있던들, 그 문체들이 요즘의 것이 아니라 해도, 그 시대 그 인물들을 완결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릴적부터 내가 알던 그 문학은, 나에게 지엄하게 이야기한다. 준호와 채주희, 그리고 당숙처럼 쓸쓸히 살다 간 사람들에 대해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라고. 


  20-07-31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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