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코맥 매카시 지음, 임재서 옮김 / 사피엔스21 / 2008년 2월
평점 :
절판
1980년, 미국 텍사스의 작은 마을. 제2차 세계대전에 복무한 다음 평생 보안관으로 성실하게 살아온 에드 탐 벨은 도저히 설명 불가능한 사건에 맞닥뜨린다. 멕시코 마약상들이 누구에겐가 총알 세례를 받아 말 그대로 벌집이 되어있는 채 발견된 것이다. 그들의 마약은 간 데 없고 240만 달러가 들어있던 돈가방도 감쪽같이 사라졌다. 돈가방을 챙겨든 사람은 별 소득 없는 사냥 중이던 가난뱅이 르웰린 모스다. 모스는 곧 무시무시한 추격자 안톤 시거에게 쫓긴다. 모스가 밤새도록 달려 아무리 멀리 떨어진 한적한 마을에 숨더라도 시거는 그를 찾아낸다. 벨 보안관은 이 두 사람을 뒤쫓지만, 이들이 그리는 궤적 위에 죽어 자빠지는 연쇄적인 시체의 행렬을 보면서, 이 사건들 이면에 잠복한 절대적인 악의를 깨닫고 무력감에 사로잡힌다.
당신은 코맥 매카시의 소설을 먼저 읽어도 좋고, 코엔 형제의 영화를 먼저 보아도 좋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그 어느 쪽으로도 독자적인 완성도를 지닌 채 하나의 테마를 훌륭하게 변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윌리엄 예이츠의 시 <비잔티움으로의 항해>로부터 시작되는 테마다. “저것은 늙은 사람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 서로 팔짱을 낀 젊은이들과 숲속의 새들, 저 죽음의 세대들은 노래를 부르며 스스로 취해있고...모두들 저 관능의 음악에 취하여 늙지 않는 지성의 기념비를 모르는구나.” 이것은 자칫하면 젊은 세대의 경박을 한탄하며 좋았던 옛 시절을 회상하는 노인들의 푸념처럼, 자칫하면 현재 미국의 도덕적 진공 상태를 꾸짖는 보수적인 시선으로 여겨질 위험도 있다. 그러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노인’은 단지 무력감을 느끼는 보안관 벨을 지칭하는 단어가 아니다. 영화에서는 등장하지 않는 소설 속 한 대목을 보자. 벨은 불과 40년 전 학교 선생들의 설문 조사에서 ‘학생들의 가장 골칫거리 행동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기껏해야 껌을 씹거나 복도에서 뛰어다니기, 숙제를 베끼는 것이었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40년 후 교사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졌을 때 나온 대답은 강간, 방화, 살인, 마약이었다. “나는 세상이 점점 망해가고 있다고 오래 전부터 말하곤 했지만 사람들은 그저 미소를 지으며 내가 나이가 들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이런 것도 하나의 징후다. 하지만 강간하고 살인하는 일을 껌 씹는 일과 구별할 수 없는 사람은 나보다 훨씬 더 큰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이 내 느낌이다. 40년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다. 아마도 다음 40년 동안은 난데없이 아주 괴상한 것이 등장할지 모른다. 너무 늦은 게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그는 덤덤하게 결론 내린다. “악마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많은 일이 설명되지 않는다. 적어도 나한테는 그렇다...노인들은 별로 혼란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차라리 그들은 실성한 사람처럼 보인다. 이런 점이 나를 괴롭혔다. 그들은 마치 잠에서 방금 깨어 왜 그곳에 있는지 모르는 사람 같았다.” 그러니까 ‘노인’은 물리적이고 육체적인 쇠락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의 삶과 이웃 공동체에 대한 아주 평범하고 윤리적인 원칙을 지키며 살아온 사람이 불현듯 잠에서 깨어나 이 세상이 미치도록 빠른 속도로 엉망진창이 되어가고 있음을 깨닫고 시공간적 혼돈에 빠져드는 그 어지러운 감각, 상상하지 못했던 도덕적 애매모호함의 순간에 직면하는 순간 자신의 원칙이 이미 이 세상에 걸맞지 않은 것임을 깨닫게 되는 그 고통스러운 정서를 함축하는 말이다. 소설과 영화의 마지막은 공히 똑같은 장면으로 끝맺는다. 벨 보안관은 죽은 아버지에 대한 꿈을 이야기한다. 자신을 지나쳐가며 그토록 춥고 어두운 어딘가에서 횃불을 들고 미리 기다리려 했던 죽은 아버지. 그 꿈을 되새기는 벨 보안관, 그리고 영화 속 토미 리 존스의 느릿하고 부드러운 어조는 예이츠의 소망과 달리 ‘지나가버린 것, 지나가고 있는 것, 혹은 앞으로 다가올 것’이 그토록 경건하고 사려 깊게 간직될 수 없음을 깨달은 자의 슬픔이다. 그러니까 예이츠의 시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비탄에서 시작하여 비잔티움이라는 이상향을 향한 희망으로 진행되고 있다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앞으로도 보답받을 수 없으리라는 절망을 응시하는 심연의 여행이다. 벨 보안관이 어린 시절 꿈꾸었던 정의로운 고전 웨스턴의 고향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총 한 자루와 말 한 마리, 기본적인 윤리 감각만으로도 평범한 민중들의 작은 소란을 위엄 있게 잠재울 수 있었던 카우보이의 시대는 애저녁에 저물었다. 벨 보안관이 맞닥뜨렸던 ‘살아있는 진정한 파괴의 예언자’ 안톤 시거는 결국 군중 속으로 사라지고, 벨은 퇴색한 기억 속으로 사라지는 쪽을 택한다. 이 절대악 앞에서 그가 행동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시는 그 자와 마주치고 싶지 않다. 나는 알고 있다. 그가 진짜라는 것을. 나는 그가 한 일을 보았다. 두 번 다시는 내 운명을 걸고 그 자를 만나러 가지 않겠다...나는 모름지기 인간이라면 영혼을 모험에 내맡길 줄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 자신은 그러지 않을 테다. 이제 다시는 그러지 않으리라.” 벨을 포함한 늙은 보안관들은 눈물을 훔치며 뇌까린다. “아무래도 관둬야겠어. 예전에는 결코 겪어 본 적이 없는 사건을 맡은 기분이야.”
여기에는 이 작품의 절대적인 축, 안톤 시거가 있다. 코엔 형제의 영화에선 우리 시대 최고의 배우 중 한 사람인 하비에르 바르뎀이 바위 같은 얼굴과 숨소리 하나 내지 않는 굳건한 입술, 무감정한 사냥꾼의 눈매만으로 모든 것을 표현한다. 그리고 코맥 매카시의 소설에선 인용 부호조차 생략된 단문의 대화, 그리고 ‘and’로 이어지는 지독하게 건조한 행위 묘사의 문장들로 제시된다. 그는 ‘돈이든 마약이든 그런 것들을 초월하는 원칙’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행위하는 존재만큼 악마에 가까운 것도 없을 것이다. 그는 가여운 희생자에게 동전 던지기 시합을 제안한 다음 앞인지 뒤인지 못 맞출때 가차 없이 살인을 저지른다. “당신은 동전에 책임을 미루고 있어요. 동전은 결정권이 없어요. 결정은 당신이 하는 거예요”라는 여인의 정당한 항변 앞에 시거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다. 그는 인간이 의지적인 행동으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으리라는 것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믿는 것은 아주 작은 결정 혹은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가 궁극적으로 몰고 오는 결과, 결산, 종말의 심판 행위 그 자체다. 그는 행위와 사물을 구별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매순간이 갈림길이고 선택이지. 어느 순간 당신은 선택을 했어. 다 거기서 초래된 일이지. 결산은 꼼꼼하고 조금의 빈틈도 없어. 그림은 그려졌고 당신은 거기에서 선 하나도 지울 수 없어. 당신 뜻대로 동전을 움직일 수는 없지. 절대로. 인생의 길은 쉽게 바뀌지 않아. 급격하게 바뀌는 일은 더구나 없지. 당신이 가야 할 길은 처음부터 정해졌어.” 이 지독한 운명론자 앞에서 사람들은 경악하거나, 머리를 숙인 채 고요히 동전을 바라볼 도리밖에 없다. 이 절대악이 불러일으키는 묵상의 순간은, 그러나 어떤 평화로운 성찰이 아니라 요한계시록이 읊조리는 멸망의 순간을 직감하는 가혹한 절망과 깨달음을 안겨줄 뿐이다. “이 나라는 아주 기묘한 역사, 지독한 피비린내를 풍기는 역사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역사의 어느 구석을 둘러봐도 그렇다.”
베트남전 직후 이토록 비정하고 무심하게 자신의 80년대를 돌아본 작품이 또 있었던가? 그 순간 여기 불현듯 겹쳐지는 또 한편의 영화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시대적 배경인 1980년에 만들어졌던 마이클 치미노의 역사극 <천국의 문>이다. 전작 <디어 헌터>로 베트남전의 악몽을 이야기하고 ‘미국의 잃어버린 순수’를 위무하는 듯한 손길을 보냄으로써 미국인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던 치미노는, 바로 다음 작품 <천국의 문>으로 저주를 퍼붓는 할리우드로부터 완전히 버림받았다. 베트남전의 악몽을 잊으려던 그 시기, 카터 시절의 ‘유약한 미국’ 대신 핸섬하고 강건한 이미지의 레이건이 이끄는 ‘강한 미국’을 꿈꾸던 그 시기에 치미노는 100년 전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희망과 꿈에 부푼 1870년대와 1890년대 실재했던 대학살극을 선명하게 대비하여 스크린에 담아냈다. 아주 오래전 네이티브 아메리칸들이 학살당했던 와이오밍 주에서 이번에는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몰려든 동유럽인들이 먼저 정착했던 백인들에게 떼죽음을 당한다. 백인이 백인을 몰살시키는, 그래서 동유럽 이주민들이 “이 나라에는 살인자들밖에 없는 건가?”라고 울부짖으며 자진하여 목숨을 끊는 내용을 무려 220분 동안 담아낸다. 비극은, 인간의 오류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침없이 남을 희생시키는 악은 무정하게 되풀이된다. 아메리칸 드림을 이토록 산산조각내는 영화, 마지막까지도 어떤 희망도 남겨두지 않은 채 철저한 ‘패배주의’(이 단어를 매우 주의깊게 써야 할 것이다)와 냉소로 일관한 영화, 그러니까 ‘우리 모두’의 토대를 부정한 그런 영화. 아마도 1980년에 이 영화를 보았던 대부분의 미국 관객은 ‘모욕’이라고 받아들였으리라, 그리고 아예 이걸 없었던 영화, 존재하지 않았던 영화로 망각해버렸으리라. 그렇게 치미노는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천국의 문>을 외면하기란 쉽지 않다.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숙명적인 패배감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정체성의 심연을 그토록 끈질기게 파고들고자 했던 그 무서운 의지는 차라리 경이롭다. 그리고 약 30여년이 지난 지금, 아카데미 시상식장에서 코엔 형제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로 박수갈채를 받으며 완벽한 승자의 위치에 올랐다. 2008년에 미국은 정말로, 과연, 비로소 자신들의 ‘폭력의 역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것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