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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세계사
크리스 하먼 지음, 천경록 옮김 / 책갈피 / 2004년 11월
평점 :
진실을 알려주는 빨간 알약, ‘민중의 세계사’
지금부터 백년전에 베른슈타인이란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는 민주주의와 평등이 확대되고 사회가 모든 면에서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라고. 십년 전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이렇게 말했다. 역사는 종말했다고. 많은 사람들이 이름 한번쯤은 들어봤을 앤서니 기든스라는 사람은 이렇게도 말했다. 좌·우파의 범주는 이제 낡은 것이 되었다!
서양사람들만 하는 얘기가 아니다.
우리나라 80년대 그 유명했던 운동권 사람들이 지금은 대통령부터 중요한 자리들까지 꿰차고 있다. 자신들이 평화개혁세력이고 합리적인 진보세력이라면서 말이다. 아. 맞아. 그렇지. 민중이 어쩌고 민주주의가 어쩌고 반미 어쩌고 했던 사람들이 지금 권력을 쥐고 있는데 말야.
그런데 이상하다. 우리가 날마다 듣는 얘기들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단지 노동조합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일터에서 쫓겨난 사람들, 비정규직은 사람도 아니라며 20대 꽃다운 나이에 차디찬 서울역 바닥에 버려진 KTX 여승무원들. 하다못해 전기요금 몇 천원 낼 돈이 없어 전기가 끊긴 사람들. 이상하다 이상해. 분명 백 년 전 아니 몇 십 년 전보다 지금이 더 잘사는 것 같은데... 왜 그 사람들이 하는 말이 우리가 듣거나 보거나 진짜로 겪는 거하곤 다르지? 이런 궁금증이 계속 몰려온다.
크리스 하먼의 ‘민중의 세계사’는 바로 그런 궁금증을 풀어줄 책이다. 책 제목부터가 왠지 따분해보이고 맘에 안든다구? 그런 생각 잠시 접어두고 조용히 책장을 넘겨보자.
크리스 하먼은 옛날 옛적에 사람이 지구에 처음 나타났을 때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하먼은 분명하게 말한다. 원래 부족의 우두머리는 다른 부족사람들을 위해 더 먼저 일어나 일하고 더 늦게 잤다고. 게다가 그때는 남녀차별도 없었단다. 날짐승을 잡는 힘센 남성들은 사냥이 신통치 않아 여성들이 캐온 들나물이나 열매를 먹는 경우가 더 많단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하먼의 말을 계속 들어보면 우리가 역사를 얼마나 잘못 알고 있었는지 깨닫게 된다. ‘찬란한 로마문명’이란 말 뒤에 숨어 서로 죽여야만 자신이 살아남았던 노예검투사들의 피와 원한이 서린 원형경기장. 성스러운 십자가를 매만지며 한손엔 코란 한손엔 칼이란 ‘미개한’ 이슬람인을 그야말로 미개한 방법으로 죽인 유럽인들. 돈놀이에 푹빠진 중세기독교를 예수의 이름으로 통렬하게 비웃던 루터가 오히려 힘없는 농민들을 미친개 취급한 얘기.
이 책은 보면 볼수록 나를 미치게 한다. 하나는 내가 지금껏 생각했던 역사를 마구 뒤집어 놓은 것 때문에 그렇고 또 하나는 내가 역사를 잘못 알게 가르쳐온 기존의 국가 교육이 생각나서다.
이야기는 계속 이어진다. 신대륙 발견이란 편파적인 언어 뒤에 숨은 콜롬부스와 그 후손들의 잔인한 원주민 대학살. 아메리카 드림이란 말 뒤에 숨은 아프리카 노예들의 비참했던 노예선 이야기. 자유, 평등, 박애란 프랑스대혁명에 춤추고 노래했던 프랑스 사람들의 기대는 저버린 체 재산의 많고 적음에 따른 투표권 부여. 자기나라를 버리고 도망간 프랑스 왕에 분노해 직접 총을 들었던 파리 시민들. 이쯤 되면 눈 뒤집히지 않을 사람이 없겠다.
하지만 잔인한 것은 이제 시작이다. 마침내 자본주의가 지난날의 낡은 사회를 깨부수자 착취와 억압은 더욱더 철저하게 야만으로 바뀌었다. 유럽인들은 아담 스미스가 말한 ‘부의 원천은 노동’이란 말과 ‘자유로운 국가들의 교류’는 잊어버린지 오래됐다.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아프리카·아시아·라틴 아메리카라고 하는 맛있는 ‘케이크’를 서로 차지하려다 드디어 싸움이 일어난다.
그 싸움이 바로 우리가 많이 들은 1,2차 세계대전이다. 그전만 하더라도 인류는 사람을 잔인하게 죽이는 것이 힘이 부쳤다. 하지만 기술과 과학의 발달로 단 하루 그것도 단 몇 분안에 수만명이 죽는 것이 쉬워졌다. 히틀러는 수백만의 유대인을 아무런 죄의식 없이 즐겁게 독가스로 죽여버렸고 미국은 자유의 이름으로 일본에 원자폭탄을 퍼부었다. 서로 더 많은 ‘이윤’을 가져가려는 노력은 이렇게 20세기를 절망과 공포의 세기로 바꿔버렸다.
하지만 크리스 하먼의 이야기는 이런 짓눌린 사람들의 슬픔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렇게 비참했던 순간을 뒤집어 보려던 가슴 따뜻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함께 들려준다. 로마 노예검투사들의 반란에서부터 총을 들고 파시스트에 맞서 싸운 스페인과 프랑스 노동자들의 이야기. 지금껏 모두가 유럽의 뒤쳐진 나라라고만 알던 러시아에서 맨 먼저 노동자 정부가 세워진 이야기. 그리고 잔인하긴 히틀러나 똑같았던 스탈린에게 도전했던 수많은 국가들의 수많은 노동자들의 투쟁들. 크리스 하먼은 다른 주류역사가들이 무시하던 ‘반란’이란 이름의 역사를 너무나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얘기해주고 있다.
이 책이 훌륭한게 바로 이 때문이다. 지금껏 세상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얘기해주면서 앞으로 역사를 어떻게 만들지 그 열쇠를 우리에게 건네기 때문이다. 이 열쇠는 마치 영화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가 미래에는 네오가 될 평범한 사람에게 건네는 빨간 알약과도 같다. 그 열쇠를 받을 텐가? 아니면 못본체 하고 그냥 일상생활로 돌아갈 것인가? 하지만 그전에 알아둘게 있다. 나 혼자만 네오가 될 것이라 착각하진 말자. 왜? 네오는 바로 민중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