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많이 알려진 책은 어쩐지 손이 가지 않았다. 일종의 고집이랄까. 누구나 다 느끼는 거지만 이렇게 알 수 없는 고집들이 늘 주변에 존재해 있다. 하지만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써 하루키의 소설을 읽지 않았다면 아마 할 말이 그 만큼 많이 줄어들 것이라 생각했기에 삼십대를 한 달여 남겨둔 지금의 시점에서 그의 대표적인 소설을 읽었다. 우선 누구나 무리 없이 잘 읽히는 장점이 있었고, 다른 여타 외국 소설과는 다른 느낌이 들었다. 이국적인 느낌이 드는 외국작가들은 어쩐지 우리네 정서와는 분명 차별성이 느껴진다. 허나 그의 소설은 같은 비슷한 문화권이라 그런지는 모르지만 분명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빠져들게 하는 뭔가가 있었다. 그 뭔가는 뭐랄까 사람의 심리를 잘 자극한 솔직함과 너무도 섬세한 묘사력과 중간 중간에 뛰어난 미문(美文)들, 톡톡 튀는 대사에 있다고 생각된다. 간혹 섹스를 나누는 부분들이 숨겨져 있지만 전혀 외설적이지 않았고, 오히려 진지하게까지 느껴졌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일의 의미. 그 물음을 던진 하루키는 전 세계 많은 젊은 독자들에게 커다란 그 이상의 의미를 하나씩 품게 만들었다. 정신과 육체가 건강한 와타나베와 그를 중심으로 얽히는 삼각관계. 끝임 없이 사라져가고 생겨나는 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관계는 마지막장에서 그가 미도리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음과 동시에 나오코의 죽음으로 결국 끝이 난다. 왜 유독 그의 주변에서는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았을까. 암울한 성장기의 시대. 너무도 많은 큰 밝음(희망)이 있기에 어둠이 확연하게 드러나기 때문일까 이 소설은 철저하게 잘 아울러진 바퀴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감을 유지하는 분위기가 좋았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 나오코를 대신한 레이코와의 의식과도 같은 섹스장면과 미도리가 던진 '자기, 지금 어디야?' 라는 질문은 이 책의 가장 큰 압권이었다. 와타나베가 스스로 자문한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라는 물음은 현재 이 책을 읽는 모든 독자에게 한번쯤 자신을 되돌아보게 한다. 나는 이제 서른이 얼마 남지 않았다. 좀더 일찍 젊은 날에 이 책을 알았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크지만 어쩐지 이십대를 보내는 지금 이 시점도 그리 나쁘지는 않다고 본다. 스스로를 성장시켜가기에 내게 있어 충분히 자양분이 되어 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