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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게임 - 전 지구적 자본주의와 비디오게임 아우또노미아총서 50
닉 다이어-위데포드 외 지음, 남청수 옮김 / 갈무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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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이용자도, 개발자도 아닌 사람에게 이 책의 쓸모란 무엇일까? 무엇보다 게임에 대한 지식도, 흥미도, 소질도 없이 살아온 나에게 말이다. 그것은 이 책이, 당연하겠지만, 게임에 대한 해설서가 아니라는 것, 다시 말하면 게임 자체에 대한 비평은 아니라는 것이다. <제국의 게임>이라는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저자들, 닉 다이어-위데포드와 그릭 드 퓨터는 제국이라는 현대의 전지구적 질서 속에서 게임을 분석한다. 물론 이 개념은 하트와 네그리의 저서, <제국>에서 가져온 것이다. 제국은 단일 국가에 의해 통치되지 않으며 “네트워크 권력”을 통해 작동하는, “전지구적 자본주의에 의한 협치”로서, “경제적∙관료적∙군사적∙의사소통적 구성 요소들을 결합시키는 새로운 지구적 체제”다. 그렇다면 이 제국에서 게임의 역할은 무엇인가? 저자들에 따르면 가상 게임은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본질적이고 표현적인” 제국의 매체다. “18세기 소설이 … … 부르주아적 인격을 생산하는 텍스트 장치였으며, 20세기 영화와 텔레비전이 산업적 소비주의에 필수적이었던 것처럼, 가상 게임도 마찬가지로 21세기 전지구적 초자본주의를 구성하는 그리고 아마도 그것으로부터의 탈출 인계선을 구성하는 매체”라는 것이다. 이쯤되면 게임에 대한 무지를 반성해야할 것만 같다.


그렇다면 게임은 어째서 제국의 본질적인 매체인가? 그것은 가상 게임의 탄생에서부터 시작된다. ”“비디오 게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모든 사람들은 모두 미국 군사 산업체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고학력의 기술과학자인 이들은 직간접적으로 소련과의 핵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고용된 사람들이었다. 컴퓨터 게임은, 이들이 “고용주가 제공한 귀한 컴퓨터 이용시간을 낭비”하면서 시작되었다. 재밌는 점은 이들이 ‘하라는 일은 안하고’ 컴퓨터를 가지고 노는 일이 허용된 이유다. 그것은 그렇게 ‘노는’ 일이 “새로운 용처와 선택지들을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즉 정해진 규정과 절차를 벗어나 다양한 방식으로 컴퓨터를 가지고는 일이 예기치 못한 변수들을 계산해 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함으로써, 이들에게 주어진 본래의 업무 -무엇인지 잘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핵전쟁에 대한 대비’에 도움이 되는 일- 에 혁신을 불러올 수 있는 방법이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노는 일’은 단순한 놀이를 넘어선다. 그건 진짜 ‘일’이다. 놀이를 일로 만드는 이러한 메커니즘은 제국의 게임이 갖는 주요한 특성 중 하나다. 우리는 가상 게임의 그러한 속성이 그 기원에서부터 함께 했다는 것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어쨌든 가상 게임의 기원으로 다시 돌아가면 거기에는 또 다른 요소도 있었다. 그것은 1960년대와 70년대의 대항문화다. 초기의 비디오게임은 군사연구소의 컴퓨터에 대한 해킹을 시도하고, “재산권과는 상관없이 정보를 공유하는 유토피아적 세계”를 믿었던 학생들을 통해 확산되었고, 이들의 디지털 실험은 당시의 대항문화와 깊은 관련성을 지니고 있었다. 베트남 전쟁 당시 군이 지원하는 전자전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연구실의 연구원들은 그럼에도 전쟁을 반대하고 있었고, 전쟁에 반대하는 파업을 지지하는 프로그램화된 서한을 만들거나 시위를 컴퓨터로 조직하였다. 이렇게 “가상 게임의 기원에는 두 개의 적색 공포가 있었다.” 하나는 냉전 시기 국방부로 하여금 더 많은 돈을 디지털 연구에 쏟아붓게 만든 외적인 위협이고 또 하나는 “반체제 문화에 의한 내적 전복”이었다.

“베트남 전쟁과 리차드 닉슨에 반대하는 성명서들이 실린 대자보들이 잔뜩 붙어 있는 연구실에서 게임을 하는 학생들” 그리고 이들과 접속했던 해커들은 이렇게 군사 비밀 체제를 위해서 만들어진 정보통신기술들을 디지털 놀이로 바꾸어 버렸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것은 게임과 컴퓨터를 펜타곤으로부터 해방시키고 핵 위협의 세계에서 그것들을 탈영토화시킴으로써, 해커들은 의도치 않게 순수하게 상업적인 형태를 띤 자본주의에 의해서 발생하는 재영토화를 위한 무대를 다시 만들어 주게되었다”는 것이다. 요컨대, 게임은 군사 기술을 디지털 놀이로 전유하며 탄생했지만, 그것은 다시 상품으로 재전유되었다. 게임의 탄생은 그 시작부터 흥미진진하다.

상품으로 재전유된 현대의 게임, 즉 제국의 게임은 어떤 모습인가? 저자들에 따르면 하트와 네그리는 제국의 노동 조건들, 주체성의 형성들, 그리고 투쟁 형태들에 대한 분석을 제시한다. 이 책은 이러한 분석을 게임에 대해 수행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게임 이용자는 단순히 게임을 수동적으로 즐기는 사람들만은 아니다. 게임산업이 이윤 창출을 위해 채택한 혁신적 방법은 바로 “게임 이용자 자체를 비물질노동에 동원하는 과정”이다. 게임을 “개조하고, 배포하고, 다른 용도에 맞게 고치는 광팬들의 문화”는 “애초에는 매우 자율적이며 유사불법적인 행위였다.” 그러나 이러한 “참여 문화”는 곧 게임 자본의 이윤의 원천이 되었다. 이러한 “놀이노동”과 관련한 활동으로 저자들이 드는 예는 소규모 개발, 개조, 다중접속 게임, 머시니마(게임으로 제작된 영화) 등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소규모 개발자들 혹은 게임 이용자들의 자발적인 활동들이 게임 회사들의 이윤의 원천으로 포섭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게임 제작사인 이드는 <둠>을 출시하면서 이용자들이 스스로 게임을 수정하고 인터넷을 통해 공유할 수 있는 도구를 포함시켰다. 이러한 전략이 게임을 더욱 풍성하게 하는데 기여했음은 물론이며, 이를 통해 이드는 “자발적인 생산인재 풀”을 무상으로 취할 수 있었다. 이렇게 게임산업은 “자발적인 생산을 혁신과 수익의 원천으로 흡수하는 방법을 깨닫게 되었”지만, 이것은 역설적으로 게임산업이 얼마만큼 게임이용자들, 즉 놀이노동자들의 협력에 의존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점은 저자들이 책의 3부에서 본격적으로 ‘다중의 게임’을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또한 비물질노동은 주체성의 생산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비물질노동으로 통해 생산되는 “상품으로서의 그것[게임]의 성공 혹은 실패의 여부는 관계의 창조”에 달려있다. 예를 들어 마이크로소프트의 <엑스박스>는 “하드코어들에게 어필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발매되었다.” 하드코어란 간단히 말해 게임 매니아로서 이들은 자신을 특별한 주체의 위치에 놓는데, 그것은 경쟁이나 싸움에 휘말리는 “행동하는 남자”와 같은 것이다. 젊은 남성 게임이용자를 위한 이 콘솔은 “경주용 차와 사이보그 전사 등에 대한 가상의 이미지들을 가정하며, 비하와 쓰레기 같은 대화를 전제함으로써, … … 젊은이, 남성성, 디지털 놀이에 관한 선입견을 유지하는 데 계속적으로 공조해 왔다. 즉 그것은 하드코어 주체를 재생산했다.” 이와 유사하게 “하드코어/콘트롤러” 조합을 택했던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과 달리 닌텐도의 <위>는 “원격/간헐적 이용자” 조합을 택했고, 이들의 전략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즉 게임 시장의 판도는 주체성을 어떻게 설계하는 가에 의해 좌우되는 문제로 된 것이다. 이러한 “육체-정서적” 참여를 통해 게임 이용자들은 게임기 자체, 그 기계 자체가 된다. 콘솔 구매 그리고 그와 관련한 일련의 소비 행위들로 이루어진 상품의 그물망은 이제 이 기계적 주체들의 에너지를 동력으로 하여 작동한다. 기계적 주체들은 마치 자동화된 “인간-기계 시스템”에 삽입된 “부품 조각들”과도 같아 보인다. 이들은 실로 ‘노동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계적 종속화는 불안정하다.” 자본의 이윤을 향한 경주는 기존의 구축된 것들을 탈영토화하고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며, 이 과정에서 기계적 주체들에게 예상치 못한 자율성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콘솔 해킹, 자가제작, 불법복제 등을 이에 대한 예로 든다. 이렇게 저자들은 끊임없이 제국의 게임 속에서 배태되는 다중의 게임의 가능성을 찾아낸다.

7장 ‘다중의 게임’과 그 이후 부분들은 그러한 가능성에 대해 집중적으로 서술한다. 그에 대한 사례들로 여러 가지가 언급되지만 그 요지는 이미 앞에서 드러난 바 있다. 즉, “자신들의 이윤추구 역학에 의해 움직이는 산업들은 의사소통의 수단들을 만들고 분산시킨다. 사람들의 관심을 사로잡기 위해, 그리고 착취하기 위해 그들은 역설적이게도 자본의 독점을 감소시키는 미디어를 생산하고, 재생산하기 위한 도구를 제공한다.” 그러므로 많은 가능성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하지만 저자는 다중의 양가성에 주목할 필요를 언급한다. “상품화되고 군사화된 체제에 이미 깊이 침윤된 주체들”이 “자가-스펙타클화하는 공동창조자”가 되는 상황을 놓쳐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때문에 가상 게임들과 같은 새로운 매체들은 다중의 집단 주체성의 두 측면, 즉 창조적 반대와 이익에 대한 추종 간에 일어나는 치열한 전투의 영토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제국 내에서, 제국의 게임을 통해 벌어지는 “비물질적 내전”이다. 그럼에도 저자들은 낙관적인 전망을 놓지 않는다. “그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것은 아직 “게임 끝”은 분명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제국이 “그 통제범위들을 넘어설 수도 있는 역량들을 배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제국은 사회적 에너지에 의존하는 갈등적 시스템으로 남아있다. 제국은 이러한 사회적 에너지를 통제하에 두어야 하지만, 그 에너지는 끊임없이 제국의 훈육으로부터 벗어난다.” 때문에 “모든 제국의 게임은 다중의 게임이기도 하다.” 이것이 결국 저자들이 하고 싶었던 말이고 제국의 게임이 지닌 역설이다.

다시 처음의 문제로 돌아가보자. 게임이용자도, 개발자도 아닌 사람에게 이 책의 쓸모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로 말이다. 그것은 물론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이 책이 게임 자체에 대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이 책을 현재의 상황에 대한 하나의 상징으로 독해할 필요가 있다. 주지하다시피, 게임이용자들의 놀이가 노동이 되는 상황, 그것이 기업 이윤의 원천이 되는 상황, 게임을 군사기술로부터 빼내온 해커들이 자신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게임 상품화의 무대를 열게 된 상황은 게임을 통해서만 벌어지는 일은 아니다. 유행어처럼 되다시피한 젠트리피케이션은 정확히 그러한 상황과 동일한 작동원리를 공유하고 있다. 그러므로 게임은 단순히 상징인 것만은 아니다. 전 세계의 게임 이용자들이 사용하는 컴퓨터 -물론 게임 이용자만 컴퓨터를 사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를 만들기 위한 공장 건설로 인해 농지에서 쫓겨난 중국의 농민들이 골드경작자, 즉 디지털 광산노동자가 되는 상황은 온라인과 현실 세계가 뒤엉켜 작동하는 강탈과 착취의 일면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온라인과 현실 세계라는 구별은 온당치 않고, 어쩌면 게임과 게임 외부란 구별도 무의미할 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책에서 읽을 수 있고, 읽어야 하는 것은 <제국의 게임>이라기 보다는 ‘제국이라는 게임’이다. ‘제국의 게임’을 수행하는 것은 게임 이용자들만이 아니다.

이로써 우리는 이 책이 지닌 미덕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그것은 게임이라는 매체를 통해 제국이라는 전지구적 네트워크 지배가 작동하는 방식을 적실하게 보여준다는 것, 그리고 당연하게도(!) 나 역시 그 제국이라는 게임의 이용자였다는 것이다. 그것이 게임이용자도, 개발자도 아닌, 그리고 게임에 대한 지식도, 흥미도, 소질도 없는, 아니 없었던 나와 같은 사람이 이 책을 읽음으로써 얻게 되는 소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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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 프랑스 - 유혹에 빠지거나 매력에 미치거나 지금 이 순간 시리즈 2
박정은 지음 / 상상출판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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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4학년 여름방학 떠난 유럽 배낭여행. 한달동안 12개국을 돌아다녔다. 10년도 더 지난 지금 생각하면 과연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싶은 그런 일정이었다. 물론 지금은 절대 그렇게 못하니 그 때 그렇게 해봤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있다. 하지만 반나절만에 다녀온 나라도 있었는데 그런 나라도 가봤다고 할 수 있는 걸까 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지금은 여행에 대한 생각도 스타일도 많이 바뀌어서 많은 곳을 다니기보다 한 곳에 오래 있으며 최대한 그 곳을 느끼다 오는 편이다. '지금 이 순간 프랑스'는 이런 스타일의 여행을 준비하는 사람에게 딱인 책이다. 

프랑스 그 중에서도 파리는 첫 배낭여행을 시작하는 첫번째 도시였다. 그만큼 얼떨떨하기도 해서 여름인데 날씨가 왜 이리 변화무쌍할까, 밤이 늦었는데 해가 안 지네 신기하다 등의 기억이 제일 강하게 남아있는 걸로 보아 파리 그 자체의 매력에는 충분히 빠져들지 못했던 것 같다. 프랑스에서는 파리, 니스 그리고 모나코에 갔었는데 책을 읽는 내내 내가 갔던 곳들이 이런 곳이었다니! 떠나기 전에 읽고 갔으면 너무 좋았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에는 남들 다 가는, 가이드북이라면 앞다퉈 소개할 유명 관광지에 대한 이야기는 많지 않다. 예를 들어 파리에서는 최고 유명한 루브르박물관이나 샹젤리제 거리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그러나 일반 여행자들이 알기 어려운 프랑스 구석구석 보석같은 곳들 그리고 그 곳을 어떻게 충분히 즐기면 좋을지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그래서 다시 프랑스에 간다면 일요일엔 마레지구에 가서 에스프레소와 크루아상을 먹고, 니스에서 햇살 듬뿍 받으며 바다바라기도 실컷 하고, 보르도에 가서 와이너리 투어도 할 생각이다. 
 
또한 이 책의 미덕은 여행 에세이라고 해서 손발 오그라들 걱정을 하지 않아도 좋다는 것이다. 여행을 준비하거나 혹은 다녀와서 그 나라의 정취를 책에서나마 느끼고 싶을 때 여행기 책을 찾곤 했는데 그때마다 작가의 넘치는 감성이 부담스러워 끝까지 못 읽고 덮어버리곤 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프랑스'는 정보 위주의 깔끔한 에세이라 보는 내내 즐겁고 편안했다.   

'지금 이 순간 프랑스' 프랑스 여행을 준비하는 사람의 손에 꼭꼭 들려주고 싶은 책이다.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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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영점 - 가사노동, 재생산, 여성주의 투쟁 아우또노미아총서 44
실비아 페데리치 지음, 황성원 옮김 / 갈무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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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서 시작해보자. 『혁명의 영점』(원제: Revolution at Point Zero)은 어디인가? 부제로 붙은 ‘가사노동, 재생산, 여성주의 투쟁’, 아마도 이곳이다. 재생산노동은 “자본주의 시장에서 가장 귀중한 상품인 노동력을 생산”하고 있고, 대부분 여성들이 담당하고 있으며, 가사노동은 이것의 대표적인 형태다. 다시 말하면, 자본주의를 굴러가게 하는 것이 바로 여성들의 재생산노동이기 때문에, 혁명의 영점도 바로 그곳이어야 하는 것이다. 즉 혁명의 영점은 자본주의의 영점이기도 하다. 때문에 재생산노동을 멈추면, 자본주의도 멈출 것이고, 재생산노동을 새롭게 조직하면 새로운 사회가 시작될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재생산노동은 혁명의 영점이다. 그렇다면 왜 생산이 아니라 재생산인가?

저자인 실비아 페데리치에 따르면 “혁명의 걸림돌은 기술적인 노하우의 문제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발전과정에서 노동계급 사이에 조장되는 분열”이다. 성차별은 이 분열의 대표적인 형태다. 성차별은 단순히 허위의식의 산물이 아니라, 부불가사노동을 착취하기 위해 노동계급을 규제하고 분할하는 방식이다. “자본주의는 노동력재생산을 위해 막대한 부불가사노동에 의존해야 하지만, 동시에 노동력비용을 줄이기 위해 이런 재생산 활동을 평가절하해야”하기 때문에, 가사노동을 마치 여성의 본성에서 기인한 것으로 만든다(‘당신은 천상 여자야’와 같은 끔찍한 말). 가사노동이 타고난 기질이 되면 그것은 감춰진다. 시야에서 사라진 가사노동은 재생산노동이 아니라 공장 바깥, 가정에서 ‘사랑’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개인적인 서비스가 되었다. 그러나 재생산노동 또한 노동력이란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이기에, 공장의, 자본의 바깥에서 ‘여가를 누리는 가정’(이것은 많은 남성에게만 보이는 환상이다)이란 있을 수 없고, ‘사랑’이란 이름의 ‘아름다운 희생’은 노동착취에 대한 수사에 불과하다. 가사노동은 정말 ‘노동’이다.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맑스는 “재생산노동을 노동자의 임금으로 살 수 있는 상품의 소비와 해당 상품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으로 축소함으로써 재생산노동 문제를 가볍게 넘기고 말았다.” 때문에 어떤 이유에서건 자본주의에 대한 그의 분석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으며, “맑스주의 이론이 21세기의 반자본주의 운동에 화답할 수 있으려면 전 지구적인 관점에서 “재생산” 문제를 재고해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재생산 문제를 살피지 않는다면, 우리는 노동력이란 상품이 어떻게 생산되는지, 자본은 어떻게 이 과정을 ‘사랑’, ‘희생’ 등의 추상적 언어로 포장할 수 있었고, 이것이 어떻게 자본축적에 기여하고 있는지, 거꾸로 말하면 자본이 부불가사노동에 얼마나 의지하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삶의 모든 영역이 ‘사회적 공장’으로 얽혀 들어감에 따라, 투쟁의 장은 공장을 넘어 가정으로 확장된다. 아니, 가정은 이미 공장이었고, 그래서 투쟁의 장이었다. 그래서 여성 또한 이미 노동자였지만, 전통적인 사회주의자들, 심지어 여성주의자들도 여성들이 집을 떠나 ‘생산과정’에 참여함으로써 ‘계급투쟁’에 합류하는 것을 여성해방의 전제조건으로 여겼다. 이것은 여성도 ‘노동계급’의 일원이 됨으로써 남성과 동등해진다는 의미를 갖는 것일 테지만, 중요한 것은 남성과 동등해지는 것이 아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지만, 남성처럼 노동하는 것은 해방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의 말처럼 “남성이 이미 해방되었다고 가정하는 것이 아니라면, 어떤 점에서 남성과 동등하기를 원하는지 결정해야 한다.” 문제는 앞서 살펴본바와 같이 자본주의가 성차별에 기반한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여성주의의 목표는 자본주의 시스템 내에서 남성과 동등해지는 것이 아니라, 성차별에 기대고 있는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를, 남성과 여성 모두의 노동조건을 변화시키는 것이 되어야 한다. 자본은 성차별에 의해, 여성이라는 특수한 노동자를 생산함으로써 존속하고 있기에, 여성들이 대부분 수행하는 ‘재생산’은 자본주의적 조직방식과 변혁 양자 모두에서 중심성을 갖는다. 저자가 재생산의 우선성을 주장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이러한 재생산의 중심적 위치를 밝힌 것은 여성들의 투쟁이었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부불가사노동의 중심성을 밝히고, 사회에 대한 우리의 상(象)을, …… 가정이라는 플랜테이션농장과 조립라인의 거대한 순환으로 재구성한 것은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전개된 가사노동에 대한 여성들의 반란이었다.” 저자가 직접 참여한 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이들이 수행한 “재생산노동의 발견 덕분에 자본주의적 생산은 특수한 형태의 노동자에 의존한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따라서 사적 영역을 생산관계의 영역과 반자본주의 투쟁의 영역으로 재정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6, 70년대의 투쟁순환에 대응하여 나타난 세계경제의 재구조화는 특히 여성들에게 파국을 몰고 왔다. “노동과 천연자원에 대한 완전한 통제력을 기업자본에게 넘겨주는 것”을 목표로 하는 세계화는 이를 위해 모든 생존수단을 박탈해야 했고, “사회적 생산의 물적 조건과 대부분의 나라에서 이 노동의 주요 주체인 여성들에 대한 체계적인 공격”을 필요로 했다. 여성들이 자연자원(토지, 물, 삼림)의 비자본주의적 이용과 자급지향적인 농업을 지키는데 앞장서며, 공유재(공통재, 공유지, the commons)의 파괴를 저지하는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세계은행, 국제통화기금 등을 앞장세운 자본의 세계화는 토지와 일거리, 관습권에서 유리시키는 전 지구적 엔클로저 과정을 통해 수백만 명을 화폐수입에 의존하도록 만들었다. 또한 국가는 구조조정 프로그램과 복지국가의 해체를 통해 노동력재생산에 대한 투자를 철회했다. “보건, 교육, 연금, 대중교통에 대한 보조금이 모두 삭감되고 높은 요금이 부과되어 노동자들이 자신의 재생산비용을 떠안게 되자 노동력재생산의 모든 절합지점은 직접적인 축적지점으로 바뀌”었다.

때문에 저자의 주장은 직접적인 축점지점이 된 이 재생산영역을 다시 재구성하자는 것으로 이어진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재생산의 물질적 조건에 대한 통제력을 회복하고 자본과 시장의 논리 밖에서 재생산노동과 관련된 새로운 협력의 형태를 창출함으로써 재생산을 둘러싼 집합적 투쟁의 문을 다시 여는 것이다.” “그 어떤 운동도 참여자의 재생산을 중심에 두고 고민하지 않으면 지속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공유재가 중요한 개념으로 떠오른다. 저자도 본문에서 인용하고 있는 피터 라인보우는 에서 엔클로저 이전, 공유지를 기반으로 한 공통하기(commoning)의 삶을 그린 바 있다. 저자는 이러한 공통하기의 삶의 사례를 여성들의 공유지 수호를 위한 투쟁과 자급농업, 도시텃밭 등에서 찾는다. 자원의 공유재화(commoning)는 무엇보다 “수많은 사람들의 자산을 세계시장을 매개로 빼앗은 상품흐름과 우리의 재생산활동의 연결고리를 끊을 수 있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때 우리의 재생산노동은 자본축적의 요구에 복속된 ‘노동력’ 생산만을 위한 것이 아니게 될 것이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할 것은, 저자와 라인보우가 모두 주장하는 것처럼, 공유재가 단지 공유하는 땅, 재화만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공유재화가 조금이라도 의미가 있으려면, 우리 스스로가 공동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즉, 공유재는 물질적 사물인 동시에 사회적 관계이며, 공통적인 것(the common)에 대한 공통적인 관리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저자는 우리가 새로운 집합적 생활양식을 만들어내야 하며, 당면한 사회경제적 위기가 우리에게 새로운 형태의 사회성을 강요한다고 말한다.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혁명의 영점에 근접해있다는 말로 들린다. 지젝은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유일한 진짜 문제는 이것이다. ‘공통적인 것’을 사유화하는 자본주의의 논리가 활개치도록 놓아둔다면 인류의 자멸을 포함한 파국을 맞을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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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혼 動物魂 아우또노미아총서 43
맛떼오 파스퀴넬리 지음, 서창현 옮김 / 갈무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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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화집을 표방하는 이 책, 『동물혼』(Animal Spirits)의 서문은 다음과 같은 물음으로 시작한다. “무엇이 공통적인 것(the common)을 구성하는가?” 저자의 말을 계속 따라가보자. 이 책은 ‘동물혼이 어떻게 오늘날의 다중 개념에 속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공통적인 것의 생산을 긍정적으로 자극하는지 탐색한다.’ 정리하면, 동물혼이 다중이며, 동물혼이 공통적인 것(공유지)을 생산한다. 그렇다면 이 책의 핵심적인 열쇳말이라 할 수 있는 공통적인 것은 무엇이며, 동물혼은 또 무엇인가?

마이클 하트는 사적인 것을 자본주의에, 공적인 것을 사회주의에, 그리고 공통적인 것을 코뮤니즘에 연결시킨다. 이때 공통적인 것이란 인간의 삶을 유지함에 있어 말 그대로 공통적으로 요구되는 것들, 그러니까 우리가 서 있는 이 지구를 포함하여, 물, 공기, 삼림 등과 같은 자연적인 것들뿐 아니라 언어, 아이디어 같이 인간 노동의 산물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그러나 공통적인 것은 어떤 (비)물질적 사물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데, 위의 사적인 것-공적인 것-공통적인 것의 세 항에서도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공통적인 것은 대상과의 어떤 관계로서, ‘소유될 수 없는 것으로 전제된 사용가치에 모든 개인이 자유롭게 접근하는 형태의 점유관계’를 가리킨다. 이는 사적 소유도 공적 소유도 아닌 소유 자체를 지양하는 관계이며, 공유지에 대한 자율적인 생산/관리를 뜻한다. 이러한 공통적인 것은 하트에게 있어, 자본 안에서 자본에 대항하여 자본 너머를 상상하는 주요한 개념이다. 저자인 맛떼오 파스퀴넬리의 입장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 책의 독특한 지점은 그것을 생산하는 동물혼에 대한 이야기에 있다.

그렇다면 왜 동물혼인가? 이 책에서 동물혼으로 옮겨진 animal spirits은 저자가 처음 사용하는 말은 아니다. 케인스는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에서 “경제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고 예측할 수 없는 인간적 충동”을 ‘animal spirits’라 불렀고(국내에서는 보통 ‘야성적 충동’으로 번역되었다), 이는 다스려져야 할 대상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저자는 ‘이 개념을 전용하여 다중의 이미지를 이끌어낸다. 그는 animal spirits를 통제되어야 하는 부정적인 힘이 아니라 역사를 추동하는 살아 있는 힘으로 인식하고자 한다.’ 왜? 그것은 문화 영역 자체가 인간의 자연적인 공격성의 확장, 다시 말해 인간의 동물적 본성에서 기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인간의 공격성, 악은 혁신과 혁명의 원천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동물혼이란 다중의 근원적인 창조력을 의미한다. ‘동물몸은 다중들의 생산적 엔진이다.’

그러나 새로운 공유지를 둘러싼 지배적이고 추상적인 담론들, “지난 10년 동안 미디어 문화, 예술비평, 급진적 행동주의 그리고 학계를 지배해 왔던 분리의 하위종교”들은 비물질적인 것과 탈동물적인 것에만 강조점을 둔다. 또한 ‘창조적 공유지’로 대표되는 새로운 공유지에서 ‘창조성’은 선하고 순결하며 갈등이나 마찰이 없는 것으로 그려진다. 창조도시, 창조산업, 창조경제…… 무언가 새로운 것이 ― 잘 보이지 않지만 ― , 새로운 경제 ―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 를 이루어 우리의 앞날을 밝혀줄 것이라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저자의 말에 따르면, 공통적인 것은 ‘오직 노동, 고통, 위험, 갈등을 통해서만 구성된다’. 착취와 갈등으로부터 자유로운 공유지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또한 인간 역시 인간이란 종으로서 하나의 동물이라는 너무나도 간단한 사실을 상기해보면, 공통적인 것에 대한 이해는 언제나 “공통적인 것을 생산하는 실재의 물리적인 힘들과 공통적인 것을 둘러싸고 있는 물질적인 경제에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이 책의 각 장은 이 분리의 하위종교들이 감추고 있는 세 가지 영역에서의 분리를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첫째가 디지털 네트워크와 자유문화, 둘째가 문화산업과 ‘창조도시’, 마지막이 전쟁 테러리즘과 인터넷 포르노의 미디어스케이프이다. 이 세 영역은 세 가지 형태의 공유지와 함께하는데, 이 공유지에는 세 가지 개념적 야수들이 늘 따라다니며 기생하고 있다. 디지털 공유지의 기업적 기생체, ‘창조도시’ 이면의 젠트리피케이션 히드라, 전쟁 포르노의 미디어스케이프를 지배하는 권력과 욕망의 머리 둘 달린 독수리가 그것이다.

이들이 기생체인 이유는 생산과정 외부에서 이윤을 착취, 아니 수탈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많은 사회관계망 서비스들은 사람들의 집합 자체가 생산하는 부를 갉아먹고, 젠트리피케이션 히드라는 사람들이 집합적으로 생산한 문화자본을 지대를 통해 착취한다. 이러한 기생적인 착취양식은 비물질노동이 지배적으로 되고 있는 현대 인지자본주의의 주요한 축적방식이다. 저자가 여기서 강조하는 부문은 “모든 비물질적인 공간들에는 그 공간들에 대한 물질적 기생체들이 있다”는 점이다. “모든 공유된 음악 파일들은 아이팟으로 귀결된다.” 저자는 신경제를 겨냥하는 정치적 행동주의가 언제나 허구적 울타리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물질적인 경제기반시설은 문제 삼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우리가 컴퓨터 화면 속의 캐릭터가 되지 않는 이상 물질적 기반을 버릴 수는 없다. 그건 인간이란 동물이 벗어날 수 없는 자체의 물질성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기존의 신경제를 겨냥한 정치적 행동주의는 물질적인 경제 기반시설은 결코 문제 삼지 않았다. 즉 이들은 컴퓨터 속 캐릭터처럼 행동했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저자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같은 디지털 공유지가 허울뿐인 공유지라고 비판한다. 그것이 가치창출의 가능성을 제공하지 않음으로써 물질적 생산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디지털 공유지는 허구적 공유지, 즉 생산의 물질적 토대로부터 분리된 관념적인 공간이 되어 버렸다.”

이렇게 공유지를 관념적인 공간으로 만들어버린 담론들에 맞서 저자가 제시하는 동물혼은 ‘인류의 양가적이고 갈등적인 본능을 인정한다. 그 결과 이 개념은 비물질적이고 문화적인 생산의 삶형태적 무의식 ― 과학기술 이면에 흐르는 잉여/초과 에너지의 생리학, 자본주의 축적의 새로운 인지적이고 리비도적인 양식 이면에서 작동하고 있는 본능적이고 ‘불합리한’ 힘들 ― 을 드러낸다.’ 자유 소프트웨어, 위키피디아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집단지성의 성과는 명백하지만, 동시에 웹 사용자들의 일상적인 ‘자유노동’은 새로운 미디어 기업에 의해 착취당한다. 이러한 집단지성의 양가적 측면들 ― 때로는 새로운 공유지를 구성하면서도 때로는 자본과 공존하는 ― 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저자는 인지적 생산의 정치적 공간이 (단순히 집단적인 것이 아니라) 경쟁적임을 강조한다. 인지적 생산물은 플로리다가 말하는 ‘창조계급’처럼 ‘아름다운 창조’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힘들의 공간 속에 놓여 있다. 그렇다면 “생산이 창조적이고 인지적이 된다면, 또는 집단적이고 사회적이 된다면, 무엇이 갈등의 새로운 좌표이며 형태들인가?” 여기서 저자는 비물질 내전이라는 시나리오를 도입한다. 내전이라는 용어를 선택해야 하는 까닭은 “인지자본주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갈등들이 명확한 계급의식이나 계급구성을 갖지 않으며 동일한 미디어 공간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비물질 내전은 지식공유와 디지털 공유지라는 그 모든 수사修辭에도 불구하고, 인지노동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인 갈등들을 나타낸다. …… 비물질 내전은, 디지털에 대한 목가적인 이상향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지식 경제에 대한 손쉬운 찬양에 앞서, 문화 생산 영역이 인정해야 하는 조건이다. …… 비물질 내전에 직면한다는 것은, 집단적인 지식 생산의 어떠한 정치적 조직화도 …… 지식 생산의 어두운 측면들을 인식하고 나서야 이루어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 공통적인 것에 대한 오직 강력하고 생산적인 정의만이 이렇게 출현하는 주체성들의 윤곽을 그리기 위한 출발점이 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 대의代議에 기초한 정치학을 전복하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공통적인 자원의 생산에서 재출발하는 것을 의미한다. 비물질 내전의 거울 속에는 공통적인 것의 기획이 존재한다.

요약해보면 저자가 동물혼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창조적 공유지, 지식공유, 또래공동생산(peer production) 등과 같이 갈등 없고 아름다운 협력 속에서만 일어나는 것 같은 일들이 실제로는 힘들의 역학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 그곳에는 언제나 물질적 기생체들이 살고 있다는 것, 이러한 지식생산의 어두운 측면들을 인식해야 새로운 정치적 조직화가 가능하다는 것 등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이를 통해 저자는 인지적 공유지에 대한 낭만적 상상 ― 여기에서 잉여가치와 착취의 문제는 고결하게 삭제된다 ― 이 아닌 역동적이고 투쟁적인 정의를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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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그나카르타 선언 - 모두를 위한 자유권들과 커먼즈 아우또노미아총서 36
피터 라인보우 지음, 정남영 옮김 / 갈무리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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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게 무엇이든 우리는 거의 모든 것을 상품을 구입함으로써 충족하는 삶을 살고 있다. 대다수 사람에게 자립의 삶이란 꿈에 가깝다. 익히 잘 알고 있듯이, 우리가 가진 것은 오직 몸뚱이뿐. 오직 노동력을 판매함으로써만 살아가는 삶이 지배적인 형태다. 그것이 99%의 삶이다.

피터 라인보우가 쓴 '마그나카르타 선언'은 왜 이러한 삶이 현대의 지배적 형태가 되었는지, 다른 삶의 방식은 없었는지, 그것에 있어 마그나카르타 선언의 역할은 무엇이었는지를 살피는 책이다.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키워드는 커먼common을 기본형으로 하는 여러 단어다. ‘공통의’, ‘공통적인’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이 단어들을 역자는 대부분 음역하고 있는데, 그건 역자의 말처럼 “이 단어의 바탕이 되는 ‘공유지’the commons의 삶이 자본주의에 의해 파괴되어 그 의미가 준거할 현실을 잃었기 때문이다”. 지시 대상이 사라졌으니 그것을 가리킬 언어가 마땅치 않은 건 안타깝지만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다시 저자의 질문을 따라가 보자. 왜 우리는 상품에만 의존하는 삶을 살게 되었는가? 저자에 따르면 그건 우리가 공유지에서 쫓겨났기 때문이다. 18세기만 해도 잉글랜드의 들판은 대체로 개방되어 있었고 자작농, 아이들, 여성들이 커머닝commoning을 통해 삶을 유지할 수 있었다. 쇠나 플라스틱이 아닌 나무가 물질문화를 구축하던 시대에 숲의 공유지는 삶을 지탱하는 기반이었다. 숲은 난방과 조명, 건축자재, 신발, 쟁기손잡이 등 다양한 재료가 될 수 있는 나무를 제공해줌으로써, 자급농업의 토대를 제공해 준 에너지원의 보고이자 “민중의 안전망”이었다. 또한 사유화되지 않은 황지荒地는 사회적 보장으로 기능했다. 황지는 방목권이 없는 사람들을 커머너commoner로 만들었고, 유용한 산물을 주었으며, 다른 커머너들과 교류할 수 있는 수단을 주었다. 즉 황지를 거점으로 한 커머너들의 교류 네트워크가 형성되었다.

이것은 커먼즈가 단지 공유하는 땅, 재화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님을 알려준다. 그것은 물질적 사물인 동시에 사회적 관계이며, 다른 삶의 방식이었고, 공통적인 것에 대한 공통적인 관리를 뜻한다. 관습적으로 이루어지던 이 활동을 뒷받침한 문서가 바로 마그나카르타 선언과 삼림 헌장이다. 1215년 6월 존 왕은 템스 강 옆의 러니미드라 불리는 초원에서 반란을 일으킨 국왕봉신들과 마그나카르타의 63개 조항을 맹세로써 약속하였다. 헌장은 교회, 봉건귀족, 상인, 유대인들의 이익을 보호함과 더불어 커머너를 인정하였다. 공유지를 존재하는 것으로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공유지에서의 삶은 종획enclosure에 의해 사라지기 시작했다. 지구의 삼림지대들은 상업적 이익을 위해 파괴되었고, 전 세계의 원주민들-커머너들-이 수탈되었다.

“…… 교활한 유럽인들은 …… 삼림청이라는 거대한 상부구조를 세웠다. 모든 산과 구릉들, 그리고 미개간지와 방목지가 삼림청의 통제하에 두어져서 가난한 농부들의 가축은 땅 위의 어디에도 숨 쉴 곳이 없었다.”

세계의 공유지가 울타리 속으로 가두어진 것이다. “종획은 땅과의 정신적 유대를 파괴했고, 커머너들을 다양한 노동규율에 종속시킴으로써 프롤레타리아의 예비작업을 했다.” 추방된 커머너들은 이제 도시의 공장에서 착취되는 노동하는 신체가 되었다. 이것에 있어 종획에 의한 커머닝의 근절은 절대적인 요소였다. 이와 함께 마그나카르타는 경제적 자립을 보장했던 삼림헌장과 분리되어 오히려 사유재산의 보호와 확대에 바쳐진 지배계급의 우상이 되었다. 저자는 이것이 미국에서 마그나카르타가 차지하는 모순적인 양상이라고 말한다.

마그나카르타가 대부분 정치적, 사법적 권리와 관련되어 있다면, 삼림헌장은 경제적 생존을 다룬다. 그러나 두 헌장이 분리되면서 삼림헌장은 사장되었고, 정치적 권리를 다룬 마그나카르타는 외려 착취를 정당화하는 법적 도구가 되었다. 이렇게 정치와 경제가 분리되는 현상은 근대 국가에서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이 분리되는 것과 일치한다. 공적인 것은 국가의 영역이 되었고, 사적 영역은 ‘자유로운 개인’이 경쟁한다는 시장이 되어 자본에 맡겨졌다. 커먼즈의 영역은 사라졌다. “땅은 도둑맞았다.” 이것이 상품 교환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삶이 되기까지의 스토리다. 때문에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삼림헌장이 뒷받침된 마그나카르타이다. “정치적·사법적 권리는 경제적 토대 위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답은 명백하다. 자본주의적 삶이 하늘이 내려준 불변의 법칙이 아니라면, 그리고 그것이 1%의 풍요를 위해 99%의 피와 땀을 요구하는 방식이라면, 커먼즈를, 공통의 부를 다시 구축하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로의 회귀를 뜻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축적의 양상이 변화했기 때문이다. 공유지에 대한 수탈을 기반으로 하여 발전한 산업자본주의가 노동력의 착취를 통해 성장했다면, 지금은 다시 수탈의, 그러나 새로운 수탈의 양상이 나타난다. 비물질 노동이 점점 더 지배적으로 되는 현대 도시에서 과거의 공장은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메트로폴리스 전체가 공장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젠트리피케이션은 대표적인 자본축적의 장치다).

이제는 삶 자체가 착취의 대상이 되었다. 여기서는 사람들의 창조적인 집합적 활동이 수탈되면서 역설적으로 자본축적의 도구가 되는 양상이 나타난다. 창조적인 활동이 차이를 생산할수록, 그 차이는 지대를 생산하고, 그것은 다시 그들을 착취하는 도구가 되었다. 공통적으로 생산되는 부가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라는 울타리가 만들어 놓은 회로를 따라 흐른다. 이런 점에서 현대의 도시는 새로운 수탈의 장소다. 우리의 숲은 어디에 있는가? 필요한 것은 이 차이가 자본주의적 축적 회로를 벗어나 다른 경로를 따라 흐르게 하는 일이다.

이제 이 도시에 황지는 없다. 울타리가 쳐져 있지 않은 대지는 없다는 말이다. 때문에 우리가 커머너가 된다는 것, 커먼즈를 구축한다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이 울타리에 박힌 못을 뽑는 일을 피할 수 없다. 그것은 헌장이 왕의 영역에 제한을 가하고, 커머너의 영역에 자급적 생계를 제공하였듯이, 현재의 자본주의적 축적 회로를 가로지르고 공통의 것을 공통적으로 관리하는 방식을 새로이 발명하는 일이다. 그것은 국가에 의한 관리도, 자본에 의한 착취도 아닌 또 다른 길이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다만 우리가 공통의 감각을 발달시키고 실험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저자에 따르면 “공통권은 지역의 독특한 생태계 속에 함입되어 있다”. 공통의 감각은 단지 선언됨으로써 획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말처럼 들린다. 그렇다면 우리의 방식은 부단한 실험의 연속일 수밖에 없고, 그 양상은 저마다 독특할지도 모른다. 그 독특함은 자본주의적 축적 회로를 벗어나는 독특함이자, 저마다가 자리한 생태계가 주는 독특함이다. 그러나 그 때의 차이는 지대로 가는 차이가 아닐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새로운 차이를 열어주는, 그러면서도 커머너로서 함께하는 삶일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실험들이 이미 여러 도시의 광장에서 계속됐음을 안다. 그런 점에서 어쩌면 우리는 이미 새로운 헌장을 써나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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