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 빈센트 - 행복한 책꽂이 03
박홍규 지음 / 소나무 / 1999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누군가의 삶을 그것도 일생을 들여다보는 것은 참으로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것이 비록 책을 통한 간접적인 것이어도 말이다. 그건 마치 누군가의 비밀얘기를 다 듣고 가만히 입 다물고 있을 수 없는 상황처럼, 내 얘기를 꺼내놓게 만든다. 나도 내가 살아온 만큼을 고스란히 돌아다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를 만나고 싶다. 비슷한 그러나 뜨겁게 살아 있는 누군가를 만나고 싶다.

지금 왜 빈센트인가?
빈센트 반 고흐는 언제나 '반 고흐'가 아니라 '빈센트'라고 서명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저자는 빈센트가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로부터 이해 받고 사랑 받고 싶어서 그랬을 것이란 결론을 내리고 있다. 늘 세상과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자 했으나 번번이 실연 당했고 직장에서 쫓겨났으며 가족과 친구와 이웃에게 버림받았던 빈센트. 그는 상실된 인간들 사이의 내면적인 교류를 꿈꾸었다가 좌절했고, 그럴수록 더욱 사람들과 소통하기를 원했다고 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떤가? 사람들 사이의 소통과 단절, 진실한 내면적 교류에 관해 그 어느 때보다 많이 고민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인간관계로 인해 끊임없이 상처받으면서도 결국에 돌아가야 할 곳은 그 관계 속임을 알고 있다. 그래서 지금 굳이 빈센트를 부르고 싶다. 엉켜 사는 이유로 담쟁이덩굴을 제일 사랑한 화가 빈센트를 말이다.

그저 인간이자 화가였던 빈센트를 알게 되다.
많은 사람들이 빈센트를 '광기의 천재' 라는 말로 혹은 그런 이미지로 기억할 것이다. 그저 위대할 따름인 먼 예술가. 그러나 최근의 고흐 연구는 지금까지의 논의들과는 다르게 그를 철저히 그 시대를 살아간 인간이자 화가였음을 밝히고 있다. 그는 언제나 모자랐고 약했으며 슬펐다고 한다. 오히려 아무런 노력도 없이 타고난 약간의 손재주와 감각으로 예술가연하고자 미친 체 하는 사람들은 강한 사람이었고, 단 한 번도 가짜로 미친 체 한 적이 없는 빈센트가 결국 진짜로 미쳐버린 것처럼 보인 것은 그가 약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빈센트는 이제 존경과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해야 할 존재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지식인으로서의 빈센트에 공감하다.
아직은 낯선 말이다. 지식인으로서의 빈센트.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 진정한 지식인의 삶을 구체화시킨 사람이었다. 그는 탄광 지역 노동자들의 부르주아에 대한 저항을 1백년 전 제3계급이 다른 두 계급에 저항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정당하다고 했다. 그는 당대를 가장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었다. 부르주아 계급으로 편입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그는 항상 자신을 더욱 누추한 공간으로 이끌곤 했다.

누군가 사회주의는 비참함, 실업, 추위, 배고픔과 같은 견딜 수 없는 광경이 성실한 가슴에 타오르는 연민과 분노와 만나 태어난다고 했는데, 빈센트의 삶을 보며 그 '성실한 가슴'을 생각했다. 여기서 우리는 빈센트를 위대한 화가로서만이 아니라 누구보다 치열한 삶을 산 지식인으로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빈센트의 삶이 주는 감동
왜 빈센트의 그림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가? 그는 처음부터 보통 사람을 주제로, 보통 사람을 위하여, 보통 사람의 눈으로 그림을 그리겠다고 결심했고 평생 그 서약을 지켰기 때문이다. 빈센트의 삶과 예술의 핵심인 자유정신 속에서도 우리는 항상 무엇을 위한 자유인가와 누구를 위한 자유인가, 왜 자유인가를 발견해야 한다. 빈센트의 그림과 함께 이러한 생각들을 마주하게 되면 그에 대한 막연했던 감동은 채찍이 되고 희망이 된다.

이제 우리는 자신이 산 시대를 철저히 고뇌한 사상가 또는 지성으로서의 빈센트를 기반으로 그의 삶이나 그림을 이해해야 한다. 처음 빈센트와 나 사이에는 100년이 넘는 시간의 거리만큼이나 먼 이야기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 너무 먼 곳에 있었던 빈센트를 내 곁으로 끌어당긴다. 그리고 항상 시대와 사람에 깨어있게 할 친구로서 그를 내 삶에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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