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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읽는 세계사 - 전면개정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21년 10월
평점 :
유시민 작가의 <거꾸로 읽는 세계사>가 33년만에 전면개정판으로 재출간되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크든 작든 나의 사상과 삶에 영향을 준 책들 중 하나이기에 재출간 소식을 듣고 반가운 마음이 컸다.
90년대 초반 막 대학에 입학했던 나로서는 그동안 받아왔던 획일적이고 편협했던 교육과정에서 벗어나 세계와 역사에 대해 바라보던 시각을 바꾸는데 도움을 주었던 책이다. 당시 이 책 말고도 유시민 작가의 다른 저서인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과 <내 머리로 생각하는 역사이야기>도 주요한 필독서 중 하나였고 마찬가지로 역사에 대한 열린 사고를 가능하게끔 했다.
사실 3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르며 작가도 변하고 세계도 변하고 이 책을 읽는 독자도 변했다. 나처럼 예전의 기억을 되살려가며 다시 읽는 독자도 있을 것이고 보편적이고 개방적인 역사관을 반영한 교육을 받았던 세대의 독자들도 있을 것이며 아마도 처음으로 이 책을 접하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같은 사건에 대한 글을 보더라고 쌓아온 경험과 받아온 교육에 따라 보는 시각도 다르리라 생각된다.
전면개정판이라고 해도 책에서 다루는 사건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 책에서는 20세기의 역사적 전환을 이루었던 주요 사건들을 다룬다.
"20세기는 태양 아래 그 무엇도 영원하지 않은 '역사의 시간'을 체험하기에 좋은 100년이었다. 그토록 많은 것이 사라지고 생겨난 100년은 없었다' 라는 작가의 말처럼 격변의 시대였고 그 과거의 사건들은 현재까지도 우리의 삶에 영향을 주고 있다. 작가는 개정판을 내면서 단지 보충만 한 것이 아니라 말그대로 '다시 썼다'고 한다. 다룬 사건은 같지만 같은 문장은 없으며 해석과 각주도 꼼꼼해졌다. 각 장마다 각 사건들의 연표와 영향을 주었던 주요 인물들(레닌, 히틀러, 마오쩌둥, 루스벨트, 호찌민, 고르바초프 등)과 연관된 사건의 기록을 나열해 이해를 돕고 있다.
개정판에서 다루고 있는 주요 사건들은 다음의 11가지이다. 1.드레퓌스 사건 / 2.사라예보 사건 /3.러시아 혁명/4.대공황/5.대장정/6.히틀러/7.팔레스타인/8.베트남/9.맬컴 엑스/10.핵무기/11.독일 통일과 소련 해체
20세기의 사건들을 정리하자면 제국의 해체, 1,2차 세계대전, 사회주의 혁명의 봉기와 실패, 민족해방전쟁과 인권운동, 냉전과 핵무기의 발달과 위험 등이 포함된다. 한마디로 전 세계를 대상으로 펼쳐진 민족, 이념 간 갈등과 전쟁의 역사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탄압받고 희생당했으며 과학의 발달에 의해 진보된 무기로 전쟁의 결과도 더 참혹하고 잔인했다.
불과 몇 십년전의 일이며 나의 할아버지, 아버지 세대가 겪은 일이기도 하다. 냉전시대가 끝나고 모든 전쟁이 끝날 줄 알았지만 아직도 팔레스타인의 비극은 계속되고 있으며 내전으로 고통받고 있는 지역도 상당하다는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한편 21세기에 들어선 지금 과학기술의 발달 속도는 더 빨라져가고 있고 4차 산업혁명을 통해 우리는 또 다른 변화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100년이 지난 후 작가의 희망대로 인류가 핵과 기후위기를 포함한 절멸의 위험을 모두 극복하고 과학혁명의 혜택으로 자유롭고 풍요로운 삶을 누리는 경우 우리는 혁명가나 정치인이 아니라 과학자, 엔지니어, 기업인을 21세기 문명사의 역사의 주역으로 평가하게 될 수 있을까?
제1차 세계대전은 돈과 권력을 향한 탐욕이 과학혁명의 날개를 달고 벌인 참극이었다. 그런 일을 겪고도 인류는 무력행사를 절제하는 능력을 기르지 못하고 겨우 20년 뒤에 더 끔찍한 전쟁을 또 벌였다. ‘위대한 조국‘을 들먹이며 민중을 현혹해 싸움터로 내모는 권력자와 정치인은 지금도 있다. "과학기술은 발전하지만 인간정신은 진보하지 않는다."는 독일 역사가 레오폴트 폰 랑케의 말은 진리가 아니어도 경청할 만한 가치가 있다. - P67
그러나 주기적으로 찾아드는 불황과 ‘승자독식‘으로 흐르는 양극화 현상에서 보듯, 인간은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을 임의로 통제하지 못한다. 대공황은 사람들이 더 많은 상품의 생산에 열광하고 물질적 부의 축적을 최고의 선으로 여기던 시기에 세상을 덮쳤다. 인간은 자신이 요술램프에서 불러낸 거인을 다루지 못하는 소년과 같았다. 오늘 우리는 그때와 얼마나 다를까? - P129
평화로운 공존을 원한다면 가해자인 이스라엘 정부와 국민들이 팔레스타인 민중을 피해자로 인정하고 그들의 억울함과 분노를 풀어줄 방법을 찾아야 한다. - P237
베트남전쟁의 상처는 어디까지나 ‘가해자‘로서 입은 것이었다. 그 문제를 덮어두고 한국과 베트남의 우호관계를 말하는 것은 남과 자기 자신을 모두 속이는 일이다. 그런 식이라면 합리화하지 못할 죄악이란 없다. - P274
20세기는 사회혁명과 전쟁의 시대이자 민주주의의 시대였다. 볼셰비키혁명은 인류의 오랜 꿈을 실현하려는 이상주의 운동의 산물이었지만 비인간적이고 비효율적인 전체주의체제를 낳았으며 민주주의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소멸했다.(중략) 사회혁명과 전쟁의 시대를 증언하던 베를린장벽의 붕괴는 20세기가 경제적 자유와 정치적 민주주의의 승리로 마무리됐음을 선포했다. - P363
‘우주의 시간‘에서 보면 모든 것이 ‘헛되고 또 헛된‘ 일이지만 ‘역사의 시간‘에서는 그렇지 않다. 인간은 그 무엇도 영원하지 않다고 믿으면서 불합리한 제도와 관념에 도전했다. 때로 성공했고 때로는 실패했지만, 그렇게 부딪치고 싸우면서 짧고 부질없는 인생에 저마다의 의미를 부여했다. 20세기는 이렇게 말한다. 그렇게 사는 거야. 불가능은 없어. 아무것도 영원하지 않아! 그렇지만 나는 의심한다. 영원한 건 없어도 지극히 바꾸기 어려운 것은 있지 않나? 나는 ‘역사의 시간‘과 ‘우주의 시간‘ 사이에 ‘진화의 시간‘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것은 ‘진화의 시간‘ 속에서만 달라질 수 있다. ‘역사의 시간‘에서는 바꾸기 어렵다. - P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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