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판타지의 독자가 아니다. <반지의 제왕> 같은 판타지영화는 챙겨 보는 편이지만, 판타지소설은 거의 읽어 보지 않았다. <해리포터> 시리지는 소설은커녕 영화를 본 적도 없다. 간혹 소문난 판타지 영화나 관람하는 소비자인 셈이다.
이런 문외한의 처지에서 판타지소설을 써보려니 막막하기 그지 없다. 광대한 판타지물의 세계를 답사하자니 갈 길이 너무 멀어서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왜 그 동안 판타지의 고전들을 읽지 않았던가!
필독해야 할 국내외 판타지 작품들을 주섬주섬 사모으고 있지만 생각보다 책을 붙들고 있을 여유가 없다. 조급하고 게으른 탓이다. 결국 판타지세계를 안내해줄 요긴한 책들을 찾게 된다.
가장 많이 찾는 게 소위 창작이론서인데, 나도 글쓰기를 가르치지만, 창작의 이론이나 격언들은 실상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창작이론서를 읽는니 그냥 아무 내용이나 끄적이는 게 백번 낫다, 는 게 내 지론인데, 무색하게도 이론서를 들춰보고 있다. 여러 이론서를 읽어보니 몇 권은 정말 잘 썼고, 약소하나마 도움이 된다. 그러나 지침들을 잘 숙지하고 정작 써보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창작이론서들 중에 장르물을 위한 가이드는 많지 않다. <웹소설 작가를 위한 장르 가이드> 시리즈가 있는데, 내용이 너무 소략해서 보나마나 도움이 되지 않을 게 뻔하다.(그래도 개인적으론 BL장르는 전혀 생소해서 이 장르에 대한 책은 개론적인 이해를 쌓는데 도움이 될 듯하다.)
최근에 나온 창작서 중에 <넷플릭스처럼 쓴다>(다른, 2020)를 훓어 보았는데, 첫 글에서 새겨들을 만한 가르침을 얻었다. 가르침은 간명하다. 장르는 세계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SF와 판타지와 공포) '세계를 다루는 장르다. 이들 장르에는 특유의 서사적 요소가 거의 없다. 반면 미스터리, 로맨스, 범죄 장르는 서사적 특징이 뚜렷하다. SF와 판타지, 공포는 독자나 관객을 작품 안의 특별한 세계로 초대한다. 그리고 이 특별한 세계에 매혹되는 독자와 관객은 아주 많다.(15)
다양한 장르 중에서도 미스터리나 로맨스는 이야기에 대한 흥미가 중요한 반면, 판타지 등은 특별한 세계 자체로 독자를 유인한다는 것이다. 미스터리나 로맨스는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고, 판타지나 SF는 어떤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해서 읽는다는 것이다. 즉 현실과는 다른 법칙이 적용되는 낯선 세계에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한마디로 판타지의 성공은 어떤 세계를 상상하는가에 달려 있다.
<넷플릭스처럼 쓴다>는 소설과 드라마, 영화 등에서 장르물을 다루어온 작가들의 창작지침을 모아놓은 책이다. 사실 내용만 본다면, 다른 지침서들과 크게 다를 바 없다. 구체적인 연습방법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강력한 실전용 창작지침서인 재닛 버로웨이의 <라이팅 픽션>과 견출만 하지만, 내게 필요한 사항들은 아니다. 단지 판타지 장르는 세계를 다루어야 한다는 걸 배운 것만으로도 <넷플릭스처럼 쓴다>는 가치가 있다.
추신: 넷플릭스와 관련된 책이지만 <넷플릭스처럼 쓴다>와 <규칙 없음>(알에이치코리아, 2020)은 표지가 너무 유사하다. 나온 시기도 겹치는데, 두 출판사가 모종의 관계가 있는 것인지,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