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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멀리서


책장의 시집을 정리했야겠다는 생각이 든 건 읽지 못하는 미안함이 아니라 그 마음이 허영이라는 걸 깨달아서다. 내가 좋아한다고 말한 시들, 읽고 싶을 때 읽어야지 하며 쌓아둔 시집들은 그 마음의 결과였다. 물론 계절마다 떠오르는 시집이 있고 시가 있다. 좋아하는 단어가 등장하거나 좋아하는 것들이 나오면 더 찾아서 읽기 마련이데, 그러다 보니 어떤 시집은 하나의 시만 읽고 나머지 시들은 읽지 않는 경우가 많다.

박준의 시집 『마중도 배웅도 없이』도 꼼꼼하게 읽지는 않았지만 이번 시집에는 유독 짧은 시들이 많았고(나만 그렇게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제목 때문인지 아쉬운 느낌이 있었다. 누군가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그것이 시인의 것일지도 모르지만. 가만가만 그 일상을 따라가다 마주한 상실과 슬픔은 박준의 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라는 걸 확인한다. 특별할 것 없는 하루하루에 대한 소회는 그 하루가 얼마나 소중한지 기억하라고 한다. 처음 읽을 때는 몰랐는데 이 글을 쓰면서 다시 읽는 시가 지독하게 쓸쓸하고 외롭게 다가오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해가 지면

책도 그늘이 됩니다

두어장씩

넘겨가며 읽었지만

이야기 속 인물들은

아직 친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호숫가 마을에

막 도착한 대목에서

책을 덮습니다

귀퉁이를 잇새처럼

좁게 접어둡니다

바람이 크게 일고

별이 오르는 밤이면

우리가 거닐던 숲길도

깊은 속을 내보일 것입니다

(「소일」, 전문)





올해는 비가 잦습니다

서쪽 마을에서 생각보다

오래 머물렀습니다

버린 기억을

테두리처럼 두른 것이

제가 이곳에서

한 일의 전부입니다

끝을 각오하면서도

미어짐을 못 견디던 때였고

온전히 가져본 적 없어

손에 닿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한움큼씩

쥐고 보던 시절이었습니다

틀림없이 나를 향해

다가온다 싶으면

일단 등부터

지고 보는 버릇도

이즘 시작된 것입니다

(「은거」, 전문)

책을 읽다 멈추고 잦은 비를 바라보며 걱정하는 일상은 우리가 보낸 지난여름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나와 다르지 않다는 건 얼마나 큰 위로인가. 박준의 시가 닿는 곳에는 그런 다정함이 있었다. 그러면서 그런 다정함과 그 뒤에 감춰진 고단함을 생각한다. 나는 가늠할 수 없는 어떤 것들.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마음이나 형체를 알 수 없는 감정들.

유월과 칠월을 지나는 동안에는 쌀을 두컵씩만 씻었습니다 그 사이 뜨물 같은 마음도 생겨 아득한 것마다 가까이했습니다 움켜쥐면 적은 듯도 했지만 반듯하게 펴면 이내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아래 흰빛」, 전문)

자꾸만 ‘미음’을 ‘마음’이라 읽는 건 왜일까. 끓이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걸까. 그러면 끓이면 그 마음은 뜨거워질까, 아니면 끓이다 보면 증발하는 것일까. 아니다, 모든 건 다 제목 때문이다. 엉켜 붙은 어떤 마음, 자꾸만 꿈에 보이는 누군가를 떨쳐버리고 싶은 내 마음. 그 모두와 이별해야 한다. 마중도 배웅도 없이, 완벽하고 완전하게.

미음을 끓입니다 한 솥 올립니다 회회 저으며 짧게 생각합니다 같이 사는 동안 보여주지 못한 나의 수선이 어른거립니다 이내 다시 되작거립니다 체에 밭쳐둡니다 아시겠지만 진득하게 남은 것은 버려야 합니다 묽어져야 합니다 고개를 파묻습니다 나는 아직 네게 갈 수 없다 합니다 (「마음을 미음처럼」, 전문)

시집을 읽다 보면 솟구치는 욕망. 시집을 더 읽어야 한다는, 더 갖고 싶다는 허세가 커진다. 그러나 나는 이제 그것들을 다스릴 줄 안다. 적어도 지금은 그렇다. 11월의 마지막 날, 박준의 시를 읽다가 엉뚱하게 허연의 시를 찾는다. 11월의 시가 아닌 시월의 시. 이번에는 ‘시월’ 대신 ‘십일월’을 넣어서 읽는다. 이별하는 시간이다.

이별하는 것 말고 다른 것도 할 줄 아는 사람은 시월을 잘 모르는 사람이다. 병동으로 옮겨지기 시작하는 단풍잎. 영혼이 빠져나가 파삭거리기만 하는 풀밭, 초속 오 센티미터로 떨어지는 마지막 열매들. 죽은 새끼들을 낙엽에 묻고 날아가는 새들. 그리고 흙장난하는 아이들 이마에 불어오는 사연 많은 바람. 시월엔 가득 찼던 것들과 뜨거워졌던 것들이 저만치 떠날 짐을 꾸린다. 그걸 알아챈 추억들도 남쪽으로 가고. 시월엔 이별이 전부다. 시월은 이별밖에 할 줄 모른다. 시월에 무릎을 꿇는 이유다. 세상엔 만남의 몫이 있는 만큼 헤어짐의 몫도 있어서 이토록 서늘하다. (「시월의 시」,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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