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건 상수다. 변하지 않는다. 삶을 둘러싼 모든 것은 변수다. 원하는 대로 변하기를 바라지만 그런 삶은 어디에도 없다. 믿었던 이는 나를 배신하고 사랑했던 이는 나를 배반한다. 아, 그러니 삶 자체는 상수가 아니라 변수다. 자꾸만 고꾸라진다. 배신하고 배반한 이들처럼 나 역시 그런 선택을 하고 싶게 만든다. 그렇다고 그런 방향으로 갈 수 있는 몇이나 될까. 혹시나 하며 배신한 이의 소식을 기다리거나 배반한 사람이 잘 살기를 바라기도 하는데.
김지연의 단편집 『조금 망한 사랑』을 읽다 보면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싶어 조금 위안이 된다. 나 혼자 망하고 나 혼자만 되는 게 없는 것 같아서 속상했던 마음이 살짝 괜찮아지는 거다. 이래서 소설이 좋다. 현실 아닌 소설마저 누구나 잘 살고 누구나 성공하면 속상해서 살맛이 안 나니까. 그러나 왜 이렇게 사는 건 힘들고 좋은 일은 늦게 오거나 소식이 없는 것일까 속상함이 밀려온다. 아무튼 김지연의 단편은 나쁘지 않다. 좋다.
베프는 아니더라도 좋은 친구, 좋은 사람을 만나 관계를 유지하며 지내기를 바라지만 그건 참 어렵다. 전 남자친구가 주변 사람과 가족에게 돈을 빌리고 연락을 끊어버린 「포기」는 가장 쉽게 일어날 수 있는 배신이다. 돈의 액수를 떠나 어떻게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냐는 마음에 힘들다. 나로 인해 그 사람을 알게 된 이들에게 피해를 준 것 같아서다. 따지고 보면 돈을 빌려주거나 업무를 진행한 사람은 그들인데 말이다. 한데 이상한 건 소설 속 돈을 빌린 ‘민재’를 걱정하는 나의 사촌 ‘호두’의 마음도 알 것 같다. 돈을 갚는 건 둘째고 무슨 사고라도 난 게 아닐까 걱정하는 마음 말이다. 그리하여 소식이 닿은 민재가 돈을 조금씩 보내는 게 반갑고 기쁜 것이다. 심지어 돈을 다 갚으면 관계가 완전히 끝나겠구나 싶은 아쉬운 마음까지.
이불을 개면서 더는 만나지 않는 친구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궁금해한다. 아무한테도 말할 수 없었던 사정은 조금 나아졌는지, 모두에게 상처를 주며 잠적해야만 했던 일에서는 벗어났는지, 무슨 일을 하며 사는지, 잘 지내는지, 건강한지, 아픈 덴 없는지, 아무리 고심해 봐도 나로서는 그런 질문들에 답을 내릴 수 없고 그 답을 아는 사람들이 곁에 있기를 바라다가고 이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저어버린다. (「포기」, 38쪽)
마음은 언제나 그렇다. 알 수 없다. 삶이 알 수 없듯이 마음이 그렇다. 김지연은 이렇 마음을 잘 포착한다. 내 맘 같은 갈팡질팡한 마음. 동거하던 동성 연인과 헤어지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린 「긴 끝」의 ‘문애’의 마음과 이혼하면서 양육권을 포기한 아들의 소식을 전해 듣고 복잡해진 ‘인지’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좋아하는 마음 없이」에서도 만날 수 있다. 연인과의 이별을 받아들이는 일은 쉬우면서도 어렵다. 끝이 났다는 걸 실감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미련 때문에 주춤한다.

연인과의 관계가 그러한데 혈연으로 이어진 자식과 부모는 어떨까. 전 남편의 외도로 인해 이혼을 하면서 모든 관계가 끝났다고 여겼는데 전 남편의 죽음으로 달라졌다. 어찌 된 일인지 보험금 수령자가 인지였다. 보험금의 일부를 양육비로 받고 싶다는 아이의 새엄마. 인지 역시 재혼으로 새로운 가정을 꾸렸지만 아이는 없다. 때문에 아이가 친엄마와 살고 싶다는 소식에 혼란스럽다. 좋아하는 마음 없이 아이를 키운 새엄마의 마음은 무엇일까. 데려오고 싶은 마음과 그렇지 않은 마음이 충돌한다. 하루에도 수없이 변하는 마음, 누구도 강요할 수 없는 마음 아니겠냐고 김지연은 말한다.
“그럼, 이제 끝?”
“응, 끝.”
“진짜 끝?”
“진짜로, 끝.”
인지는 모든 것이 완전히 끝일 수는 없다는 걸 알면서도 단호하게 말했다. 분명한 건 오늘 그들을 생각하는 일은 그만둘 거라는 것이다. 그러나 다음날에 다시 또 생각난다면 그때 그냥 내버려둘 것이다. (「좋아하는 마음 없이」, 167쪽)
이처럼 삶은 엉뚱한 방향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결혼할 수 없지만 결혼 같은 걸 할 수 있겠다 믿었던 문애에게 코로나의 여파는 결국 이별까지 불러왔다. 이혼하고 남남이라 여겼지만 아이가 둘 사이를 오가는 가장 중요한 변수가 되었다. 되는 게 없다고, 이번 생은 망했다고 농담을 해 보지만 망했다고 삶이 그 순간 멈춰지는 게 아니라는 걸 알기에 우리는 힘을 쏟을 무언가를 찾아 나선다. 연인 ‘서일’은 떠나고 남겨진 빚을 갚아가는 「반려빚」의 ‘정현’처럼 말이다. 사실 이 소설집에서 가장 인상적인 단편을 꼽자면 「반려빚」이 아닐까 싶다. 세상에 나 반려견, 반려묘, 반려나무, 반려그림도 아닌 반려빚이라니. 현실을 풍자하는 것 같지만 그게 우리의 실상이라는 걸 부인할 수 없다.
자동차 할부와 은행 대출 때문에 사표를 낼 수 없고 다시 한 달을 살아간다는 웃지 못할 이유처럼 정현은 그렇게 살아간다. 먹고 싶은 것도 못 먹고 말이다. 그럼에도 서일이 연락을 해 오자 반갑고 잠깐 동안 정현의 집에서 지낼 수 없냐고 물었을 때 냉큼 그러라고 하고 싶은 마음이라니. 우여곡절 끝에 빚을 다 갚고 서일의 전화번호를 쓰는 초등학생과 통화를 하는 정현의 마음을 알 것은 건 나뿐일까.
김지연이 담아낸 인물과 일상은 뻔하면서도 뻔하지 않은 우리의 모습이라 함부로 욕할 수 없고 함부로 편을 들 수도 없다. 돈의 크기와 상관없이 누군가에게는 생계와 직결된 것이고 단 칼에 끊어낼 수 없는 게 관계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능을 마친 조카가 삼촌과 유자밭에서 유자를 따고 유자청을 담그는 소소한 일상을 들려주는 「유자차를 마시고 나는 쓰네」에서 행복과 불행으로 채워진 삶이라는 걸 발견하는 이런 문장에 울컥해질 수 밖에.
사람은 지극히 행복할 때 느닷없이 슬퍼질 수도 있다는 것을 이제는 나도 알지만. (「유자차를 마시고 나는 쓰네」, 293쪽)
우리가 사는 삶은 마냥 행복할 수 없다. 그렇다고 마냥 불행한 건 아니다. 행복한 기억을 빌려 불행을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언제 다가올지 모를 불행이라는 변수와 담담하게 혹은 힘 있게 악수하며 살아가는 게 삶인지도 모른다. 조금 망했다고 삶이 끝나지 않는다. 그것이 나에게만 한정된 게 아니라는 보통의 진리가 큰 위안으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