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드라마를 봤다. 마음의 상처가 있는 남주, 능력 있는 남주, 그러나 어김없이 관계에 무지하고 제멋대로 자기중심적인 남주, 카메라가 남주를 비출 때마다 후광이 따라오게 만들어 '멋진 남성 떠받들기' 신화에 한몫 단단히 하고 있다. 웃는 얼굴이 이쁘고 (몸매도 이쁘고) 똑 부러지게 친절해서 '윗사람에게 이쁨 받고' 승진도 하는 여주는, 마치 여자는 어떤 일이 있어도 웃어야 한다고 강요하는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 돈 없고 힘없고 빽도 없는 여자, 돈 많고 힘 있고 빽도 있는 남자, 이 구도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 문제 해결은 남자, 위로하고 보듬는 역할은 여자. 이것도 마찬가지. 속이 터진다. 거기다 할많하않 이성애 로맨스 어이없음은 기본이지.
2.
영화를 봤다. 돈도 없고 힘도 없고 빽도 없는 청춘들이 자본주의사회와 거기에 푹 절은 인간들에게 먹히고 있었다. 가장 아래에서 노동하는 사람들, 억압과 착취와 모멸을 견뎌야 겨우 먹고 살 수 있는 사람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사람들, 그들에게 갑질과 성희롱을 일삼는 인간들. 비교와 성과에 목을 매는 사회. 일이 잘못되면 가장 아래의 사람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사회. 형사는 원인을 찾아 길을 거슬러올라가지만 거대한 벽에 부딪힌다. 촘촘하게 잘도 짜여 있지, 모두의 합작품인 이놈의 사회는. 암담하고 가슴 아프다.
3.
인터넷 기사를 봤다. 성과 젠더가 나오기만 하면 득달같이 댓글 다는 인간들. 무지가 아주 빛을 발하는데 공감하는 인간들은 뭐냐. 분노가 치밀어 싫어요를 눌렀다. 다음 댓글에 또 눌렀다. 10초에 한 번 누를 수 있다는 안내가 뜬다. 기다린다. 좀처럼 댓글도 보지 않고 공감도 누르지 않지만 오늘은 참을 수가 없다. 10초를 기다려 또 누른다. 세 번째가 되니 악성 뭐시기라고 뜬다. 욕이 나온다. 기사 내용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허튼소리 모욕적인 말 퍼붓는 댓글이 악성 아니고 뭐냔 말이냐. 화면에 뜬 숫자와 알파벳을 꾹꾹 눌렀다. 싫어요 한 개. 10초 기다림. 싫어요 한 개. 10초 기다림. 악성 어쩌고. 숫자 누름. 10초 기다림. 싫어요 한 개. 암울하다. 또 다른 기사에서는 직장에서 바람직한 (그러나 여자는 마땅히 벗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남성들에게는 못마땅한) 일을 한 여성이 인터넷 '마녀사냥'으로 해직당한 이야기가 나왔고... 극악한, 어이없는, 성차별과 거대한 '남성성'을 편드는 사회, 직장, 가족, 정부...
4.
1, 2, 3이 도처에서 반복되고 일상에서 변주된다. 끊임없이, 과격하게. 1,2,3,4,5,6,7,8,9,10................................
5.
나는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이 <성의 변증법>에서 한 말들에 대체로 수긍하고 동의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이 나오게 되었는지 알 것 같다. 가슴에 얼마나 분노가 차올랐을지 짐작된다. 알게 되면, 깨닫게 되면, 세상은 이렇게 암흑이다. 앞서간 똑똑한 사람들은 그걸 견디지 못했으리라. (파이어스톤은 보부아르가 '견뎠다'라고 헌사에 썼다. 동의한다.) 평범(?)하고 보잘것없고 때로 가부장 자본주의와 타협하기도 하는 나는 가끔 터질 듯한 분노에 우울해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그냥저냥 살아버리고 있다. 모든 게 내 일 내 마음이 되면... 못 살 것 같다... 아무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고 아무도 말을 하지 못하게 한다면... 못 살 것 같다. 그러니 서로 편을 들어주자. 파이어스톤에게 편 들어주는 사람이 몇 있었다면 우리는 지금 그의 수많은 저작을 읽고 있었을 수도 있으니.
6. 대체로 동의한다고 했다. 아주 가끔 읭?스러운 부분도 있었다. 매우 급진,이라고 들었으나 생각보다 급진이 아니었다. 아마 '여자'가 주장한 것이라 더 급진적이라는 소리를 들었을지 모르겠다고도 생각한다. 그러고도 남을 세상 아닌가.
7. 울분이 차올라 책을 샀다. 그래도 해소되지 않는 분노는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러다 다른 데 신경 쓰느라 금세 잊고는 새롭게 분노하는 시간이 또 오겠지. 그렇게 잊어버리는 것이 어쩌면 견디는 힘이 되는지도. 참 바보 같지만. 세상 참, 지랄맞다는 생각 이틀째.
얼레, 많이 안 붙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