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희곡 동아리에서 재혼을 주제로 한 희곡 한 편을 알게 되었는데 그 희곡은 두 남녀의 대화만으로 이루어진 작품이었다. 이런 희곡이라면 나도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처음 갖게 되었다. 이것이 내가 희곡에 도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희곡 동아리로 인해 읽게 된 체호프의 희곡 또한 내가 용기를 가지고 희곡에 도전할 수 있게 했다.
사실 난 내년에 신문에 칼럼을 연재할 계획이 있어 그쪽에서 바라는 칼럼을 써 놓아야 하는데 딴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뜨거운 열정이 생기니 희곡을 잘 쓸 자신이 없으면서 어리석게도 희곡에 뜻을 두게 되었다. 종종 열정은 이성을 마비시킨다.
잘할 수 있는 일에 전념하느냐, 아니면 하고 싶은 일에 전념하느냐 이 둘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지를 놓고 고민에 빠지곤 한다.
내가 구상한 희곡은 이런 것이다.
1막 :
장소는 장례식장.
암으로 고통받다가 생애를 마친 사람(남성, 79세)이 있다. 그의 장례식장에서 고인의 고교 동창생들이 모여 앉아 안락사의 입법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각자 다른 의견을 내놓으며 찬반 논쟁을 벌인다.
(여기서 내 수준을 뛰어넘는 의견이 나와야 하므로 안락사에 대한 책을 많이 읽어 둘 것. 그리고 고교 동창생들을 전문직 종사자로 할 것. 예를 들면 법률 전문가, 교수, 의사 등. 그래야 전문적인 지식을 보여 줄 수 있다. 논쟁에 공을 많이 들일 것. 명대사가 많을수록 좋다.)
2막 :
장소는 고인의 집.
장례를 치르고 나서 고인의 자식들이 유산의 분배 문제로 다툰다. 첫째 아들은 자기가 장남이니까 재산을 많이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둘째 아들은 자기가 아버지를 모시고 살았으니 재산을 많이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막내딸은 자기가 가장 가난하기 때문에 많이 가져야 하나 재산을 셋이 똑같이 나누자고 제안한다. 그들은 해결점을 찾지 못하고 마음이 상한 채로 돌아간다.
(독자가 어느 형제의 의견에 지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각자의 의견에 설득력이 있어야 한다. 유산 문제와 관련한 사례를 책을 통해 많이 알아 둘 것.)
3막 :
장소는 고인의 집.
고인이 생전에 유언을 녹음으로 남겼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깜작 놀란 형제들은 다시 모인다. 고인은 자신이 죽고 나면 자식들이 재산 문제로 싸울 줄 알고서 죽기 전에 유언을 녹음으로 남겼다. 형제들은 재산 싸움이 부질없는 짓이었음을 깨닫는다. 변호사가 건넨 녹음기에 담긴 유언의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녹음에 의한 유언에 ‘안락사’와 관련 있는 내용이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 ‘안락사’라는 문제가 관통하여 안락사로 시작하여 안락사로 끝나는 희곡이 된다. 여기서 독자가 예상치 못한 극적인 반전이 있어야 하는 게 중요하다.)
* 유념해야 할 사항 : 안락사, 유산 문제 등의 흔한 소재로 뻔하지 않게 쓰는 게 관건이다. 참신하다는 작품 평을 받게 써야 한다. 한강 작가의 ‘어둠의 사육제’(「여수의 사랑」에 실림.)라는 단편처럼 뒷이야기가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독자가 궁금해 하게 만드는 작품이 되어야 한다. 흥미로운 대목이 많을수록 좋다. 등장인물의 캐릭터에 알맞게 대사를 써야 하는 점은 꼭 명심할 일이다.
** 이 희곡을 위한 참고 도서 : 안락사에 대한 책, 유산 분배와 상속에 대한 책, 유언에 대한 책, 인간의 이기심에 대한 책, 부모자식의 관계에 대한 책, 다른 나라의 장례 문화에 대한 책 등을 찾아 읽는다.
희곡을 여러 편 써서 그것들을 모아 희곡집을 발간하면 좋을 것 같다. 상연하는 희곡이 아니라 체호프의 희곡처럼 재밌게 읽히는 희곡을 쓰고 싶다. 이를 위해 희곡 공모를 많이 알아 둘 생각이다. 공모에서 낙선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 희곡을 완성할 수 있을 테니까.
희곡을 완성하여 공모에 응모하려면 미발표 창작품이어야 하고, 신문 연재의 글 또한 미발표 원고여야 하는 조건이 있기 때문에 이 서재에 올릴 수 없는 것이 아쉽다. 이 서재에는 책을 읽고 리뷰를 써서 올려야 하는데 이렇게 딴짓을 하고 사니 리뷰를 쓸 시간이 없다. 게다가 친정집과 우리집의 두 집 살림을 하느라 시간이 넉넉하지 않다. 그래도 시간을 짜내어 쓰는 걸로....
내 역량이 부족하여 미완성 작품으로 끝나더라도 희곡을 쓰는 동안 즐거웠던 걸로 기억하게 되는 그런 시간을 보내고 싶다.
안톤 체호프, 「체호프 희곡 전집」
끝으로 체호프의 희곡 '갈매기'에서 인상적으로 읽은 것을 옮겨 놓는다. ‘트리고린’이라는 소설가가 한 말이다.
트리고린 : 어떤 성공 말이오? 한 번도 나 자신을 좋아한 적이 없소. 작가로서 나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무엇보다 나쁜 것은 내가 어떤 혼란에 빠져 있어서, 무엇을 쓰고 있는지도 종종 이해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나는 바로 이 물과 나무, 하늘을 사랑하고, 자연을 느낍니다. 자연은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과 억제할 수 없는 바람을 불러일으켜요. 하지만 나는 단순히 풍경화가가 아니라 조국과 민중을 사랑하는 한 사람의 시민입니다. 만일 내가 작가라면 민중과 그들의 고통, 그들의 미래에 대해서 써야 하고, 인간의 권리와 과학, 기타 등등에 대해서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가 모든 것에 대해 말하고 서두르면 사방에서 사람들이 나를 몰아대고 화를 내서 마치 사냥개들한테 쫓기는 여우처럼 나는 이리저리로 허우적대는 겁니다. 인생과 과학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나는 열차 시각에 대지 못한 농부처럼 계속해서 뒤처지고 늦어지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하여 종당에는 내가 쓸 수 있는 것은 단지 풍경뿐이며, 나머지 모든 것에서 내가 틀렸다는 것을, 속속들이 틀렸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겁니다.(‘갈매기’에서)
- 안톤 체호프, 「체호프 희곡 전집」, 42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