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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무엇인가 - 예일대 17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 ㅣ 삶을 위한 인문학 시리즈 1
셸리 케이건 지음, 박세연 옮김 / 엘도라도 / 201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죽음이란 무엇인가” 솔직히 말하면 난 모른다. 호기심 많던 어린 시절에 어머니께 수많은 질문을 했었는데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그 질문 중 여전히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다. 한때는 믿었다. 초등학교 앞에서 십자가를 든 어른들이 죽음 이후의 세계는 천국과 지옥으로 나뉜다고 했던 것을. 한때는 믿었다. 죽음과 동시에 우리는 공포영화 속 그 귀신처럼 된다는 것을. 한때는 믿었다. 죽음 후 우리는 새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지금은 믿지 않는다. 10년 넘는 시간을 돌아 나는 어린 시절로 되돌아왔다.
죽음이 무엇이냐는 질문은 잘 생각해보면 ‘죽다’의 뜻을 묻는 게 아니다. ‘죽다’, 즉, 죽는 행위는 살아있는 우리 역시 눈으로 볼 수 있는 행위다. 그것은 누워있던 늙은 어른이 유언을 말하려다 눈을 감는 것일 수도 있고, 아팠던 누군가가 병원 침대의 흰색 천으로 얼굴까지 덮이는 것일 수도 있다. 드라마 속에서 우리가 너무도 많이 봤던 장면들이다. 우리는 그걸 궁금해 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궁금해 하는 것은 죽은 상태다. 다른 사람이 보는 상태가 아니라 죽은 당사자가 느끼는 상태다. 여전히 ‘죽음’을 모른다고 답하는 나는 그 상태를 가리켜 “그런 건 없다.”라고 말한다. 내가 이 질문은 처음 던졌을 때 어머니께 들었던 답도 그랬다. 그 때 이 답은 내게 매력적이지 않았다. 지금은 믿지 않지만 천국과 지옥이 존재한다는 답이 어릴 적 내게는 더 매력적인 답이었다.
셸리 케이건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우리가 궁금해 했던 그 죽음, 다시 말해 ‘죽은 상태’가 뭘까? 죽음과 동시에 육체가 죽는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사후세계가 있다면 우리에겐 육체 이상의 것이 있다는 의미이다. 그게 있다면, 영혼이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앞부분은 영혼의 유무에 관련한 설명으로 채워졌다. 영혼이라는 게 있을까?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고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있다면 영혼이 존재할 거라는 가정 하에 논리를 풀어나간다. 셸리 케이건은 결국 영혼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냈다. 결론은 같지만 그의 논증 방법에 동의하지 못했다.
그의 논리는 지나치게 형이상학에 치우쳐있다. 앞에서 말한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고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있다면 영혼이 존재할 거라는 가정”부터 그렇다. 우리가 ‘영혼’이라는 ‘개념’의 존재를 놓고 따지는 중이라면 위 가정은 맞다. 하지만 우리가 그 존재를 따지고 있는 ‘영혼’은 ‘개념’이 아니라 ‘실체’다. 이 경우에는 특정 현상을 설명하는 데에 ‘영혼’이 필요한 지 아닌 지를 따지는 방법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영혼’이 존재하는지 아닌지를 따져야 한다. 케이건의 지나친 형이상학적 논리는 결국 6장에서 허점을 드러낸다. 그는 복제 이후의 상황을 고려하다가 결국 얼버무리다시피 영혼의 존재를 부정했는데 복제라는 것을 고려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실체에 대한 해석은 철저히 실체 위에 올려야 한다. 생명을 ‘복제’하는 것은 아직 우리가 확인한 실체가 아니다. 있지도 않은 실체를 고려하다보니 ‘영혼’이라는 실체를 가져와야 하는 딜레마에 빠지는 것이다. 마치 연주시차를 관찰하기도 전에 “우리가 지동설을 받아야 할까? 아니야, 그래도 난 천동설 할래.”식인 것이다. 복제 이후에 ‘인격’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영혼’의 실체를 인정할 지는 복제 이후의 현상을 보고 논할 문제다.
논증방법은 껄끄러운 면이 있지만 케이건은 결국 영혼이 없다는 가정, 즉 일원론 하에서 논리를 펴나간다. 우리가 말하는 삶의 범위 또는 죽음의 범위는 어디에서 어디까지인가. ‘영혼’의 논증과정에서 그는 ‘육체’와 철저히 연결되는 ‘인격’을 이야기하는데 - 복제 논의에서 이 ‘육체’와 ‘인격’의 연결이 깨지면서 그는 ‘영혼’을 받아들여야 하는 딜레마에 놓였다. - 이 삶 또는 죽음의 범위를 논함에 있어서도 인격의 죽음과 육체의 죽음이 나뉜다. 여기에서 ‘인격’을 ‘뇌’라고 생각하면 아주 편하다. 케이건은 특정인의 인격이 죽은 후에는 그의 목숨을 거두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함으로써 '안락사'에 찬성하는 모습을 보였다.
죽음이 정말로 나쁜 것일까. 여기에서 케이건의 설명방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죽음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를 논하는 과정에서 그는 죽음을 논하는 데에 그렇게 많은 지면을 할애하지 않았다. 그는 사실 죽음이 아니라 삶을 논하고 있는 것이다. 삶을 긍정적으로 볼 지 부정적으로 볼 지를 논하고 그 반대를 죽음에 적용하는 식의 논리다. ‘삶이 좋은 거야? 그러면 영원한 삶은 어때? 그건 싫지? 이상하지? 그러면 삶은 도대체 뭘까?’ 케이건이 이렇게 이야기를 풀어가는 동안 우리 역시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진정으로 좋은 삶은 무엇일까,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책의 겉표지에 광고 문구처럼 적혀있는 “나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된다.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의 진가는 여기에서 드러난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끝부분의 테마는 ‘자살’이다.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없애는 행위. 우리는 ‘자살’에 대해 흔히 “어리석다”, “나쁘다”라고 이야기하는데 케이건 역시 이 두 가지를 짚는다. 자살은 합리적인가, 아니면 어리석은가. 도덕적인가, 아니면 비도덕적인가. 사견을 달자면 케이건의 의견과는 달리 나는 이 둘이 분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일단 ‘자살’이 비도덕적이라고 볼 수 있는 근거 중 내가 인정할 수 있는 것은 주변사람에게 슬픔을 준다는 점 하나 뿐이다. 나는 목숨 역시 자기결정권에 속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합리성의 문제를 보자. ‘자살’이 그 자신에게는 이로운 것일까. 만약 이롭다면, 다시 말해 ‘자살’이 합리적이라면 주변사람들도 그에게 이로운 길을 존중해줘야 하는 게 아닐까. 자살에 있어서 합리성과 도덕성은 분리되는 문제가 아니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2년 전에 이 책과 제목이 아주 유사한 베스트셀러가 있었는데 바로 <정의란 무엇인가>였다. 이 베스트셀러를 보고 많은 지식인들은 사람들이 부조리한 현실에서 정의에 목말랐다는 말을 쏟아냈다. 2년 후 우리는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정의란 무엇인가>보다 더 어둡고 두툼한 책이 베스트셀러 탑10 주위를 맴도는 것을 보고있다. 부조리한 현실 안에서 정의를 묻던 사람들이 이제는 그 현실 안에서 희망을 잃어가는 게 아닐까. 2013년 새해의 시작은 수많은 죽음과 함께였다. 기업에 맞서 운동을 하던 노동자들이 연이어 목숨을 끊었다. 다시 한 번 고인들의 명복을 빈다. 그리고 이제는 사람들이 현실 안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기를, 아니, 사람들이 희망을 찾을 수 있는 현실이 되기를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