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 역사인물 다시 읽기
한명기 지음 / 역사비평사 / 200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연산군과 더불어 폐위된 임금인 광해군. 인조반정 이후 내내 '폐주' 내지는 '혼군'이라 불리우며 폄하되고 왜곡되던 인물. 죽은 지 수백 년이 지난 20세기에 들어와서야 식민지시대 일제사학자들에 의해 명과 후금 사이에서의 '중립외교'로 주목받기 시작한 그는 이제는 제법 실리적인 외교정책으로 재평가를 받고 있는 듯하다. 나아가 누구 못지 않은 명군이었으나 정권다툼에 보위를 잃었고, 그의 몰락은 곧 사대적인 인조정권의 외교정책으로 인해 호란을 겪고 청의 속국이 되는 치욕을 불러왔다는 인식이 더해져 광해군에 대한 인식은 연민과 안타까움, 때로는 예찬에 가까워지는 경향마저 보인다.

그러나 <광해군>의 저자는 그러한 감상에 젖은 예찬도, 고의적인 폄하도 모두 거부하고 사실에 입각해 광해군과 그의 시대를 보여주려고 노력한다.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최초로 주목하고 연구한 것이 일제사학자고 그 이유가 만주(후금)와 조선을 한 묶음으로 취급하여 만주에 대한 중국의 지배권과 영향력을 배제하고 일본의 침략을 정당화하려는 정치적 이유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 것인가. 또한 '광해군=중립외교, 인조정권=친명배금정책'이라는 공식 또한 실제로는 인조정권 또한 정권유지를 위해 친명은 할지언정 배금은 하지 않았다는 역사적 사실에 의해 무참히 깨어진다.

저자에 의하면 광해군은 오랜 왕세자 기간 동안 부왕 선조의 눈치 등을 보며 전전긍긍한 탓에 내성적이고 소심해졌으며, 서자에다 차남이라는 컴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왕권강화를 도모하다 무리한 궁궐중건, 대북파의 '폐모살제' 주장 등으로 서인과 남인 등 사대부 세력을 포용하지 못하고 내정을 추스리지 못해 결국 몰락하였다. 그러나 외교분야에서만은 민첩하고 냉정하였으며, 주변국가의 정세에 조선의 어느 임금보다도 가장 민감하고 뛰어나게 대처했던 임금이었다.

광해군이라는 인물의 캐릭터가 마치 살아있는 듯 생생하고, 그의 시대 동북아시아의 정세가 대단한 현실감을 주는 것 외에도, 이 책의 미덕은 '역사는 현재의 거울'이라는 명제에 충실하다는 것이다. 광해군이 명과 후금 사이에서 전전긍긍하며 어떡해서든 실리를 잃지 않으려고 온갖 수단을 강구하는 모습 곳곳에, 그 시대 조선의 종주국 명의 정책은 20세기 한국에 대한 미국의 정책과 오버랩된다. 저자는 광해군 시대 조선과 명의 관계를, 오늘날 한국과 미국의 관계에 빗대어 놀라울만치 흡사한 모습을 찾아낸다. 글을 읽다보면, 300년 전의 이 땅의 모습과 오늘날 이 땅의 모습이 그다지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에 지정학적 위치에 처한 약소국의 설움이 밀려와 씁쓸하기까지 하다.

강대국 등쌀에 희생된 사람들이 어디 한둘이랴만은, 저자는 특별히 강홍립을 뽑았다. 명의 요구에 못 이겨 광해군이 눈물을 머금고 뽑아보낸 1만 명의 정예병을 이끌고 후금과 싸우러 갔다가 결국 항복하여 끝내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후금에 잡혀 있었던 사람이다. 그런 와중에도 그는 광해군에게 후금 내부의 사정을 계속 보고해 올렸다. 그리고 광해군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의 가족을 보호하고 그와의 서신과 물품교환도 허락해주는 것으로 보답을 했다. 여기서 저자는 이미 떠난 조국을 위해 미군 기밀문서를 빼돌린 죄로 현재 미국의 감옥에 갇혀 있는 로버트 김을 떠올리며 그에 대해 무관심한 한국정부의 태도를 짚고 넘어간다. 절로 무릎을 치게 된다.

저자는 현재만큼이나 숨가빴던 광해군 시대를 냉철히 뒤돌아봄으로써 험난한 현재의 앞날을 헤쳐나가는 데 도움이 되고자 했다. '전쟁 중이라도 사자(使者)는 오가야 한다'거나 '외교는 사술(邪術)을 피하지 않는다'는 광해군의 외교지론은 오늘날 미국에 발목잡혀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우리의 외교행태를 반성하게끔 만들고, 3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외교현실은 냉혹하기만 하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한다.

광해군, 그는 패배자였지만 오늘날 우리에게 값진 역사적 교훈을 주고 있는 것이다. 열강들의 이해다툼 속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이 험난한 운명의 후손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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