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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무렵에 면도하기 - 첫번째 무라카미 라디오 ㅣ 무라카미 라디오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오하시 아유미 그림 / 비채 / 2013년 5월
평점 :
추억 하나 만들어보려고 난생처음 울산 가던 날.
무슨 책을 읽을까?
핸드백에 넣어가야 하니까 작고 얇은 책이 좋을 텐데,
흔들리는 차안에서 읽어야 하니까 가벼운 내용이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으로 집은 책.
하루키님 장편소설은 모조리 읽었지만 아직 에세이는 몇 권 읽어보지 못했었는데
한동안 잊고 지냈던 하루키님의 문체가 와 닿아서 친밀한 정겨움이 느껴졌다.
좋다.
그저 좋다.
하루키님의 글들은.

p. 75
행운이 한꺼번에 거듭된 뒤에는 반드시 그 반향이 찾아온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정말로.
p.168~170
사랑에 빠져 있으면 그런 일이 있다.
의식이 어딘지 기분 좋은 영역을 나비처럼 너울너울 날아,
지금 무얼 하는지 잊고 있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면 긴 시간이 흐른 것을 깨닫는다.
생각건대 사랑을 하기에 가장 좋은 나이는 열여섯에서 스물 하나 정도가 아닐까.
물론 개인차가 있으니 쉽게 단언할 수는 없지만
그보다 아래라면 뭔가 어린애 같아서 우스울 것 같고,
반대로 이십 대가 되면 현실적 굴레가 작동할 것 같고,
더욱 나이가 많아지면 쓸데없는 잔꾀가 늘어서 또 그렇고 말이다.
그러나 십 대 후반 정도의 소년소녀의 연애에는 적당히 바람 빠진 느낌이 있다.
아직 깊은 사정을 모르기 때문에 실제로는 옥신각신하는 일도 있겠지만,
그만큼 모든 일이 신선하고 감동으로 가득할 것이다.
물론 그런 나날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영원히 잃어버린 뒤겠지만,
그러나 기억만큼은 신선하게 머물러 그것이 우리의 남은 (애처로운 일이 많은) 인생을 꽤 유효하게 덥혀줄 것이다.
줄곧 소설을 써왔지만 글 쓸 때 역시 그런 감정의 기억이란 몹시 소중하다.
설령 나이를 먹어도 그런 풋풋한 원풍경을 가슴속에 갖고 있는 사람은 몸속 난로에 불을 지피고 있는 거나 다름없기 때문에 그다지 춥지 않게 늙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귀중한 연료를 모아두는 차원에서라도 젊을 때 열심히 연애하는 편이 좋다.
돈도 소중하고 일도 소중하지만,
진심으로 별을 바라보거나 기타 선율에 미친 듯이 끌리는 식란 인생에서 아주 잠깐밖에 없으며 그것은 정말 귀한 경험이다.
***낭만다람쥐의♥책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