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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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다자키 쓰쿠루는 봉사활동을 통해 아카(赤),아오(靑),시로(白),구로(黑)라는 4명의 친구들을 만난다.

각기 색채가 뚜렷한 이름만큼이나 재능과 개성 또한 뚜렷한 4명의 친구들에 비해

다자키 쓰쿠루만이 이름에 색채가 없어서인지 그만의 재능이나 개성 또한 없어 혼자만의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지만

그들은 완벽한 오각형을 이룬채 순조로운 학창시절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날,

다자키 쓰쿠르는 나머지 4명의 친구로부터 일방적인 절교를 당하게 되면서

죽음의 문턱까지 닿을만큼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 후, 16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다자키 쓰쿠루는 그 때의 힘들었던 시간을 서서히 잊고

지금은 상처도, 아픔도 없다고 자신의 연인인 사라에게 과거를 고백하지만

사실은 표면적으로 아문 것처럼 보일 뿐 안쪽에서는 조용히 피가 흐르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 사라는

다자키 쓰쿠루에게 과거에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유를 알게하고자 순례를 떠날 것을 권하게 되는 내용의 책이다.

 

 

사람들은 생김새부터 재능까지 각기 다른 색채를 지니고 살고 있지만,

정작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설속 주인공 다자키 쓰쿠루처럼  자기자신은 색채가 없는 사람이라 생각하며 살고 있다.

난 왜 이렇게 생긴걸까,

난 왜 이렇게 잘하는 것 하나 없을까.. 등등..

그렇지만 그건 자신의 생각일 뿐, 타인의 눈에 어느 누구도 색채가 없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색채가 없을수록 다른 색채에 물들기 쉽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장 개성 뚜렷한 색채를 지닌 사람으로 보여질지도 모를 일인 것이다. 

그래서 소설 속 다자키 쓰쿠루가 남들 눈에는 색채가 있는 사람으로서 그룹내에서 꼭 필요한 존재였던 것처럼

어느 누구라도 자신만의 고유한 색채가 있고,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소설은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소설 속 순례를 떠나는 여정이 단순히 본다면 자신이 절교당한 이유를 찾아나서는 과정일 뿐이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결국은 자아를 찾는 과정이었다고 볼 수 있다.

주인공 다자키 쓰쿠루가 과거에 상처를 당한 이유를 알게되고,

자신은 색채가 없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만의 색채를 지닌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과정을 통해

이 책을 읽는 사람들도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고 자아를 찾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나 역시 그랬다.

아직까지도 의문인 채로 내 마음속 서랍속에 닫아둔, 정말 친한 친구에게만 털어놓은채 꽁꽁 숨겨둔 한 사건이 있다.

다행히 그때의 상처가 곪지 않고 잘 치유되어 지금은 흉터도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본다면 아직도 조용히 피가 흐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직은 그 속을 들여다보고 싶은 생각도, 용기도 나지 않지만

언젠간 나에게도 순례를 떠날 기회가 오지 않을까...하고 생각해본다.

 

 

 

오랫동안 기다렸던 책을 다 읽고 나니 공허함이 밀려온다.

마치 멀리 떨어진 오래된 친구를 몇 년만에 만나서 몇시간동안 수다를 떨고 난 뒤에

아직 해야할 말은 많이 남았지만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어 아쉽게 헤어진 뒤에 남는 그런 공허한 느낌 말이다.

어쩔 수 없는 이 공허함은 리스트의 음악으로 달래고,

언젠가 재회할 기약없는 다음 만남을 기다려보는 수밖에 없을 듯하다..

 

하루키님, 건강히, 다음에 또 만나요♡

 

   

 

요번 예약판매 이벤트 중 가장 반가운 선물은 바로 리스트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이다.

항상 하루키님 책에 등장하는 음악을 함께 들으며 독서할 수 있다면 좋을텐데...라는 생각을 자주 했었는데,

아마도 이런 독자의 마음을 하루키님이, 혹은 출판사가 잘 반영해준 듯 하다.

 

 

"프란츠 리스트의 <르 말 뒤 페이>예요.
<순례의 해>라는 소곡집의 제1년, 스위스에 들어있죠."
"르 말 뒤....?"
"Le Mal du pays. 프랑스어예요. 일반적으로 향수나 멜랑콜리라는 의미로 사용되지만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전원 풍경이 사람의 마음에 불러일으키는 영문 모를 슬픔.' 정확히 번역하기가 어려운 말이에요."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나로서는 그 일을 깡그리 모조리 잊어버리고 싶어.
그때 입은 상처는 조금씩 치유되었고 나름대로 아픔을 극복해 왔어.
물론 긴 세월에 걸쳐서.
이제 겨우 딱지가 앉은 상처를 지금 다시 열어젖히고 싶지는 않아."
"그렇지만 어떨까. 그냥 표면적으로 아문 것처럼 보일뿐인지도 모르잖아." 사라는 쓰쿠루의 눈을 들여다보며 조용히 말했다.
"안쪽에서는 아직도 조용히 피가 흐르고 있을지 몰라.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은 없어?"
쓰쿠루는 묵묵히 생각했다. 말을 하고 싶은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결국 혼자 남겨질 운명일지도 모른다.
쓰쿠루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 다가왔다가는 이윽고 사라진다.
그들은 쓰쿠루 속에 무엇을 찾으려 하지만 그것을 찾지 못해, 또는 찾았지만 마음에 들지 않아
체념하고 (또는 실망하고 화가 나서) 떠나 버리는 것 같다.
그들은 어느 날, 갑작스럽게 모습을 감추어 버린다.
설명도 없고 제대로 된 작별 인사도 없이.
따스한 피가 흐르고 아직도 조용히 맥박 치는 인연의 끈을 날카롭고 소리 없는 손도끼로 싹둑 잘라 버리는 것처럼.

 

분명 자기에게는 근본적으로 사람을 낙담케 하는 뭔가가 있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 그는 소리 내어 말해 보았다.
결국 남에게 내밀 수 있는 건 뭐 하나 가진 게 없어.
아니, 그러고 보면 나 자신에게도 내밀 것이 하나도 없을지 모르지.

 

 


"난 옛날부터 나 자신을 색채도 없고 개성도 없는 텅 빈 인간이라 생각했어.
그게 어쩌면 그룹 안에서 내가 맡은 역할이었을지도 모르겠군. 속이 텅 빈 존재로서."
아오는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해가 안 가네. 텅 비었는데 무슨 역할을 하지?"
"텅 빈 그릇. 색이 없는 배경. 이렇다 할 결점도 없고, 딱히 뛰어난 점도 없는, 그런 존재가 그룹에 필요했을지도 모르지."
아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너는 텅 빈 존재가 아냐.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
넌,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다른 모두의 마음을 안정시켜 줬어."
"마음을 안정시켜 줘?" 쓰쿠루는 놀라서 되물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들리는 음악처럼?"
"아니, 그런 게 아냐.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넌 있는 것만으로 우리가 자연스럽게 우리로서 거기 있을 수 있게 해주는 면이 있었어.
넌 별로 많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두 다리로 지면을 굳게 딛고 서서 우리 그룹에게 평온한 안정감 같은 걸 줬던 거야.
배의 닻처럼. 네가 떠나면서 우리는 새삼 그걸 실감했어. 우리한테는 역시 너라는 존재가 필요했다고.
그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떠난 이후로 우리는 갑자기 흩어지기 시작했어."
쓰쿠루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이봐,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완벽한 조합이었어, 다섯개의 손가락처럼."
아오는 오른손을 들어 그 굵은 손가락을 펼쳤다.
"지금도 자주 그런 생각을 해. 우리 다섯은 각자가 부족한 부분을 서로 자연스럽게 보충해 줬어.
각자 뛰어난 부분을 고스란히 드러내서 아낌없이 나눠 주려 했던 거야.
그런 일은 아마도 우리 인생에서 다시 일어나지 않을거야.
단 한 번만 누릴 수 있는 행운.
그런 느낌이 들어.
내게는 지금 가족이 있어. 그리고 가족을 사랑해. 당연히.
그렇지만 솔직히 말해 가족에 대해서도 그때처럼 불순물 하나 없이 순수하고 자연스러운 기분은 느끼기 힘들어."

 

 


그때 그는 비로소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영혼의 맨 밑바닥에서 다자키 쓰쿠루는 이해했다.
사람의 마음과 사람의 마음은 조화만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상처와 상처로 깊이 연결된 것이다.
아픔과 아픔으로 나약함과 나약함으로 이어진다.
비통한 절규를 내포하지 않은 고요는 없으며 땅 위에 피 흘리지 않는 용서는 없고,
가슴 아픈 상실을 통과하지 않는 수용은 없다.
그것이 진정한 조화의 근저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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