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박민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언젠가 서울대학교 도서관 대출 순위 Top10에 관한 목록이 뜬 기사를 읽은적이 있다.
그 중에서 내가 안 읽어 본 책이 딱 2권이 있었는데,
하나는 알랭드보통의 <불안>이었고, 또 하나는 바로 박민규의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라는 책이었다.
그래서 그 당시 이 2권을 한꺼번에 주문했다가 읽지는 않고 책꽂이에 꽂아만 뒀었는데
어느날 한심한 롯데의 야구를 보다가 생각이 나서 꺼내본 책이다.

 


박민규 작가님 책은 예전에 <카스테라>라는 제목의 단편소설집을 읽었던 적이 있는데,
그 당시 내가 별로 안 좋아하지만 인기만 많은 베르나르베르베르의 <나무>가 베스트셀러였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그 때 <나무>를 읽고 실망했던 기분을 <카스테라>로 풀면서
박민규 작가가 베르나르베르베르보다 훨~~~~~씬 괜찮다고 혼자 평가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번에도 그 때와 마찬가지로 우연히 발견한 책이라 별 기대없이 읽었는데,
무슨 만화도 아니고, 코미디 프로그램도 아닌데
중반부까지 읽는내내 작가의 재치넘치는 입담에 나도 모르게 소리를 내면서 폭소를 터뜨린게 여러번이었을 정도로 재밌었다.

초반~중반까지의 내용은 주인공이 성인이 되기 전까지의 시간으로,
삼미슈퍼스타즈 야구단에 관한 설명이 주를 이룬다.
그리고 중반~후반까지는 주인공이 성인이 되면서 전혀 다른 성격의 내용이 나오면서 책이 꽤 진지해진다.

 


평범한 야구인생으로 살다가 끝날 수도 있었을텐데,
"프로"야구가 생겨나면서 본인이 프로든, 아마추어든 모두가 프로가 되기를 강요받는다.
그러한 야구에 빗대어 우리의 삶도 모두가 프로인생만을 추구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래서 책은 말한다.
꼭 우승해서 프로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어야만 정답인 것이 아니라,
치고 싶은 공만 치는 삼미슈퍼스타즈 처럼 사는 인생도 그들도 그들 나름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고 있으니 틀린건 아니라고.

 


책을 읽으며 그래, 나도 초반의 주인공처럼 참 아등바등하며 살았지.. 싶었다.
대학 타이틀이 중요하고, 직업이 중요하고, 사람들이 보는 눈도 중요하고...
그렇담 나도 후반의 주인공처럼 모든것을 놓고 살아볼 필요도 있는건가? 그렇다면 지금보다 행복해질까?
라고 생각이 들었지만, 솔직히 그런 기회가 온다 해도 아직은 모든것을 놓고 살아갈 용기가 없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난 아직 프로가 아닌, 아마추어라는 걸 인정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난 아직은 삼미슈퍼스타즈의 팬클럽이 되기엔 세상을 더 살아보아야 하나 보다...

 

 

 


나는 다시 슈퍼스타즈를 생각했다.그리고 삼미의 팬이었던 나의 유년과, 현재를 생각했다.
OB와 삼성, 혹은 MBC나 해태의 팬이었던 또래의 소년들에 비해 확실히 나는 염세적인 소년이었고,
자신감이 없었으며, 세상을 어둡게 바라보고 있었다. OB의 팬이 아니라면, 삼성의 회원이 아니라면, 아니 프로야구가 없었다면ㅡ그 소년들과 나의 차이점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결국 문제는 내가 삼미 슈퍼스타즈 소속이었던 데서 출발한 것이라고, 16살의 나는 결론을 내렸다.
그랬다, 소속이 문제였다. 소속이 인간의 삶을 바꾼다.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을 담은 소년이 왜 전철 안에서 조롱을 받는가?
삼미 슈퍼스타즈의 잠바를 입고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고등학교 동창인 조부장에게 왜 굽실거려야 하는가.
삼류 대학을 나왔기 때문이다.
삼촌이 사는 남동구는 왜 개발이 되지 않는가?
소속구의 국회위원이 여당 소속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속이 인간의 삶을 바꾼다.
소속이 인간이 거주할 지층을 바꾸는 것이다.
어느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삼미의 고별전을 보고, 자장면을 보고, 「무릎과 무릎 사이」를 볼 뻔했다가
「지구괴수대전」을 보고, 돌아와 아버지에게 뻥을 치고, 샤워를 하고, 꿀물을 마시고, 대북 방송을 듣고, 밤을 새고,
그러고는 다시 아버지에게 뻥을 친 그대로 '죽는 한이 있어도 좋은 대학에 가야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던 아침이었다.

인생은 참으로 이상한 것이다.

 



인생은 결국, 결코 잘하리라는 보장도 없이ㅡ거듭 버틸 수 있는데까지 버티다가 몇 가지의 간단한 항목으로 요약되고 정리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지금도 버티고 있는, 그래서 아무 일 없이 흘러가고 있는 우리의 삶은ㅡ실은 그래서 기적이다.

 



제대를 하면서, 나는 '소속'의 고민과 비슷한ㅡ또 하나의 강박관념을 그곳에서 가지고 나왔다.
그것은 '계급'이었다.
세상은 수없이 많은 소속 안에서, 또 다시 여러 개의 계급으로 나뉘어 있었던 것이다.
마치 지구가 위도와 경도로 나뉘어 있듯ㅡ결국 인간은 그런 식으로 이 세계를 분할하지 않고서는 견대지 못하는 습성을 지니고 있었다.
위도 몇에 경도 몇....결국 그곳에 한 인간의 좌표가 위치해 있고, 우리의 삶은 여간해서 그 위치를 벗어나지 못한다.
.
.
.
결국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내가 소속된 학교에 자식을 보내고 싶어하는ㅡ돈 많은 부모들의 자제들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무작정 시작한 일이었는데, 아버지의 월급보다 더 많은 액수의 돈이 정말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지만, 위도와 경도로 나뉜 이 세상에서 일류대는 그런 힘을 가지고 있었다.
마치 이빨로 기차를 끌어 기네스북에 오른 사람처럼, 나와 나의 학교가 스스로도 대견스럽게 느껴졌다.
내가 옳았다.
소속이 인간의 삶을 바꾼다.
이제 남은 것은 계급을 끌어올리는 일이다.

 

 


인생은 참으로 이상한 것이다.
힘들다고 생각하면 힘들고, 쉽다고 생각하면 쉽다.
이혼을 하고 실직을 당한 그 시점에서부터, 나는 서서히 인생을 쉽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자 하나씩, 하나씩 할 일들이 생겨났다.
우선 그날 이후 나는 하릴없이 하늘을 쳐다보는 새로운 습관이 생겨났고,
어느새 산보를 하며 하늘을 즐기는 것이 하나의 중요한 일과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하늘을 즐기는 것이 하나의 중요한 일과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하늘을 즐겨가면서 나는 점점 낙천적인 인간으로 변해갔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신은 사실 인간이 감당키 어려울 만큼이나 긴 시간을 누구에게나 주고 있었다.
즉 누구에게라도, 새로 사온 치약만큼이나 완벽하고 풍부한 시간이 주어져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없다는 것은, 시간에 쫓긴다는 것은-돈을 대가로 누군가에게 자신의 시간을 팔고 있기 때문이다.

알고 보면, 인생의 모든 날은 휴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