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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세트] [BL] 나래아 (외전 포함) (총4권/완결)
메카니스트 지음 / 더클북컴퍼니 / 2019년 5월
평점 :
판매중지
모처럼 수작을 만났습니다. 아픈 시대이지만 동시에 매력적인 시대이기도 한, 대한제국 시대의 조선, 경성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만큼 더 반가웠구요.
사실 제가 이 소설의 리뷰에 남기고 싶은 건, 소설 안에서 묘사되고 있는 대한제국 시기 조선의 모습입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이 소설은 어디까지나 주인공 이도와 길운우의 사랑이야기입니다. 주인공들이 대한제국 시기에 살고 있다 뿐이지 이 시대의 정치나 사상적 측면은 이 소설에서 중요하지도 않고 거의 다뤄지고 있지도 않습니다. 저도 정치사상적인 감상을 남기고 싶은 것은 아니고요. 다만, 소설의 무대를 이루고 있는 껍데기(?)랄까 배경장치들을 보며 감탄했던 순간들을 쓰고 싶었네요.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 같은 현장감. 깨알같이 치밀한 고증. 와 이건 뭔가 싶었던 순간들을, 제 기억력이 휘발되기 전에 몇 가지 남겨 놓으려고요.
먼저, <나래아>의 주요 무대라고 할 수 있는 두 궁궐, ‘운현궁’과 ‘경운궁’의 생생한 묘사.
이도가 주로 생활하는 공간이자 이도의 취미공간인 깃털창고(?)가 있던 노안당, 마음씨 착한 김 순검이 출근하던 경비병 처소 수직사 등등. 운현궁의 묘사는, 정말이지 말이 필요 없는 현장중계였습니다. 이 소설을 2독 할 때는 컴화면에 운현궁 지도와 운현궁 사진들 찾아서 띄워놓고 하나하나 짚어 가며 읽었을 정도였어요. 안채인 이로당의 폐쇄적 구조, 운현궁 마당에 있는 우물, 수조까지 운현궁을 이루는 구조물들 하나하나가 소설 속에 빼곡하게 녹아들어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소실된 경운궁은, 현재는 그 일부만 남아 덕수궁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죠. 하지만 황귀비의 거처인 즉조당(이연과 고종이 여기서 영어 수업을 받는 장면도 나오죠, 이것도 좀 감탄 포인트)이나 접견장으로 사용되던 정관헌 같은 곳은 덕수궁에도 남아 있으니, 나름 현재의 그 경관을 떠올리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어요. 이렇게 치밀한 고증이 묘사 곳곳에 녹아들어 있는 bl소설, 정말 오랜만입니다. 존경합니다, 작가님.
그리고, 대박은 ‘전화’.
“…… 어마마마는 불안해했고, 아바마마는 매일 명성 황후의 묘에 전화하셨어. 그런데 갑자기 운우 도령이 나타난 거야. ……” <나래아 2권>에서 이연이가 <조선왕실비사>를 가지고 가서 운우랑 좀 어떻게 해 볼라고 꼬드기는 장면에 나오는 대화입니다.
고종이 서양의 신문물과 기술에 관심이 많았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지만(고종이 커피를 좋아했다는 에피소드 같은 건 유명하죠), 그가 열강 사이에 껴서 부평초처럼 흔들리는 조선을 지키려 애쓰면서 전신․전화, 철도 같은 새 시대의 통신․교통망을 구축하기 위해 열심이었다는 사실은 많은 분들이 잘 모르시더라고요. 근데 이연이 운우를 꼬시는 장면에서 깨알같이 등장하는 ‘전화’. 대박이네요.
이거 오타도 설정 오류도 아닙니다. 진짜 명성 황후의 묘에는 ‘전화’가 설치되어 있었어요. 고종이 전화를 좋아해서 자주 그쪽 사무소(?)에 전화했다는 것도 사실이라고……. 재미있는 일화죠. 전 커피보다 이 일화에 더 무릎을 쳤습니다.
스쳐지나가는 듯이 묘사된 적십자 병원의 설정(?)도 멋졌지요.
<나래아> 번외편을 보면 “적십자 부총재는 이도였고, 총재는 이도의 또 다른 이복형제가 역임했다. 그런데 얼마 전 적십자 총재가 독립군에게 자금을 지원한 죄로 일본군에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지금 간도라는 곳에 피신해 있어 당분간 모국에 돌아오지 못한다고 했다. 모국을 되찾겠다는 행위도 죄가 되는 해괴한 세상이었다.”라는 묘사가 나오죠.
이 소설에 등장하는 사건들(헤이그특사 파견 같은)을 종합해 소설의 구체적인 시간을 계산해 보면, 당시의 적십자 총재는 2대 총재인 의친왕 이강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분이 독립운동을 독려하다가 일본의 억압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을 꾀하는 건 이보다 뒤의 일이기 때문에(망명 시도도 결국 실패로 끝나죠), 소설상의 설정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 건 좀 아쉬웠네요. 그럼에도 고종의 아들 중 한 사람이 1907년 전후로 적십자 총재를 역임하고 있었다는 고증, 그리고 “모국을 되찾겠다는 행위도 죄가 되는 해괴한 세상이었다.”는 담담한 묘사는 참 좋았어요. 그 묘사에서 느껴지는 착잡한 심상은 슬펐지만……. 쓰다 보니 뭔가 좀 침울해지네요.
암튼, 작가님의 섬세한 자료조사도, 대한제국 말기의 조선 경성에서 꿋꿋하게 살아가는 당시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들까지 담아내는 필력에도 감탄했다는 게 결론입니다. 또한 전작들(<톡신>, <힐러>)보다 담담해진 캐릭터와 세밀한 고증이 서로 잘 어우러진 것이 보기 좋았습니다.
작가님의 다음 신간은 어떤 모습일지, 무척 기대가 되고 설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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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운우와 이도에 대하여.
길운우, 아 진짜 뼈 때리는 모습 진심 매력적이다……. 이렇게나 순수하게 촌철살인 하는 운우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지. 귀남과 단옥처럼 처음부터 운우의 치명적인 매력에 빠져들어 버리는 운현궁 식구들도 물론이지만, 처음엔 무당 초산이 말만 듣고 운우를 의심하고 무시하던 이묵마저 점점 운우의 매력에 빠져들어가는 모습은, 정말 유쾌한 한 편의 시트콤을 보는 듯했다. 그래서인지 이도는 동생의 팔도 부셔버리는 냉혹한 성깔을 운우한테는 1도 발휘하지 못하고…. 다 알면서도 운우를 위해 그의 거짓말에 속아주는 이도. 멋지다. 갖고 싶다.
아…………… 근데 무서운 이도는 좀 무서우니까, 그냥 이도는 운우랑 홍시랑 LLAP하는 것으로…… 하자.
END.
모국을 되찾겠다는 행위도 죄가 되는 해괴한 세상이었다.
감히 내 하사품을 홀대한 저놈의 주리를 틀어도 시원찮지만, 한편으로 존경심이 드는 건 무슨 조화란 말인가….
…… 어마마마는 불안해했고, 아바마마는 매일 명성 황후의 묘에 전화하셨어. 그런데 갑자기 운우 도령이 나타난 거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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