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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교인 좋은 크리스천 - 국민일보 미션라이프 인기연재칼럼
강덕영 엮음 / 상상나무(선미디어)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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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두 달이 다 되어 가는군요. 고등학교 선배 한 분이 후배들을 초청해서 저녁 식사를 대접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날의 호스트는 영업사원으로 시작해서 거대 기업을 일군 분이라고 했습니다. 신앙심이 깊어 주님의 청지기 정신으로 바르게 성장시킨 기업이라고 했습니다. 한국유나이티드제약 강덕영 회장이 우리를 초청한 분입니다. 그는 또 한 교회의 장로로 섬기고 있으며 평신도 교육을 위해 갈렙바이블아카데미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고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술에도 관심이 많아 미술 음악 연극 등을 돕고 활성화시키기 위해 유나이티드문화재단을 운영하고 있는 분이라고도 했습니다. 그야말로 다방면으로 활동을 하고 있는 분입니다.

 

4월 22일 고등학교 동문 20 여 명이 강덕영 회장 자택에 모였습니다. 동부인(同夫人)한 사람들까지 헤아리면 30 여 명이 모여 저녁 식사를 하면서 긴 대화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강 회장님과 사모님의 정성과 후배 사랑이 돋보이는 자리였습니다. 우리들의 이야기는 여러 영역을 넘어 신앙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첫 만남이기는 하지만 한 신앙인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탁해서 사업을 발전시켜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시킨 이야기는 참석자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작은 것부터 큰 것에 이르기까지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탁한 그의 믿음은 평범한 가운데 새벽 별처럼 빛났습니다.

 

세 시간 여의 방담 후 헤어질 때 받은 선물이 이 책입니다. <좋은 교인 좋은 크리스천>(강덕영 지음, 상상나무, 2013년 12월 출판). 강 회장은 이전에도 몇 권의 책을 출판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책을 통해 강덕영 장로를 처음 만난 것이 됩니다. 책의 사이즈도 포켓판이군요. 정확하게 말하면 4.6판으로 문고판보다는 조금 크지만 손 안에 편안하게 잡히는 것이기 때문에 휴대하며 읽기 좋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지금 막 읽었습니다. 신앙 에세이집이라 할 수 있는 책이라 가볍게 술술 읽어 내려갔습니다. 하지만 그 내용은 여느 책에 뒤지지 않는 무게를 갖고 있었습니다.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은 일차적으로 수익을 올려야 합니다. 강 장로도 국내외 1천 여 명의 직원들을 책임지고 있는 큰 기업의 회장입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이나 또는 정치를 하는 사람들, 즉 세상을 바쁘게 살아가야 하는 이들에게서 좋은 글을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바람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미안하지만 강덕영 회장도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으로 예단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책을 읽고 생각을 교정해야 했습니다. 그는 훌륭한 문필가의 반열에 벌써 올라 있는 사람이었으니까요. 그 바쁜 와중에도 여러 권의 책을 출간했더군요. 시간 나는 대로 읽어 볼 그의 책은 <1%의 가능성에 도전하라>, <사랑하지 않으면 떠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다>, <종교인과 신앙인> 등이 안표지 저자 소개란에 등재되어 있었습니다.

 

그 중 이 책과 더불어 <종교인과 신앙인> 은 국민일보 미션라이프에 고정적으로 연재한 신앙 칼럼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큰 인기 속에 글을 연재할 수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글은 이미 대중적인 검증을 마쳤고 따라서 그는 문필가가 되는 셈입니다. 처음 이 책을 받아들고 왜 같은 말을 반복하는 제목을 달았을까 호기심이 일었습니다. <좋은 교인 좋은 크리스천>. '교인'과 '크리스천'은 같은 뜻입니다. 영어 '크리스천(chriatian)'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 '(기독)교인'이 되니까요. 저 나름대로 추측해 본다면, 유어(類語)를 반복함으로 뜻을 강조하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나 글을 읽으니, '교인'과 '크리스천'을 구별하여 평범한 신앙인(교인)과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는 신앙인(크리스천)으로 나누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강 장로는 '좋은 크리스천'의 위치에 서서 이 글을 쓰고 있는 사람에 해당합니다.

 

이 책은 모두 4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0편씩의 글을 담고 있는 각 부의 명칭은 차례대로 이렇습니다. 1부 '좋은 교인 좋은 크리스천', 2부 '성경 속에서 배우는 진리', 3부 '바른 신앙 바른 가치관', 4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 제목에서 눈치 챌 수 있겠지만 하나님 앞에 바로 서서 예수 향기를 전하는 신앙인이 되자는 내용입니다. 그는 행함이 따르는 신앙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집에서도 천사, 교회에서도 천사가 될 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 들을 수 있다는 거예요. 신행불일치(信行不一致)의 교인들을 보고 교회 나가지 않고 집에서 혼자 예배를 드리는 '가나안 교인'('가나안'을 거꾸로 읽으면 '안나가'가 됨)이 100 만 명을 넘고 있다고 그는 걱정합니다.

 

강 장로가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그는 보수 신앙의 소유자입니다. 하지만 융통성 없는 꽉 막힌 보수는 아닙니다. 분명한 신앙의 원칙과 기준을 가지고 있지만 근본주의 신학에 대한 그 나름대로의 가치를 인정해 줄 줄 알고, 또 진보주의 신학의 장점을 이해하려는 아량도 가지고 있습니다. 현충일 기념식 다른 편에서 열리고 있는 빨치산 축제를 보고 그 사람들도 6.25 동란 때 지리산 자락에서 사랑하는 부모 형제를 잃은 사람들(65쪽)이라며 그 한을 풀고 가야 할 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 번 물면 절대 놓지 않는 진돗개 전도법이 꼭 아니더라도 믿는 자가 전도하면 하나님께서 열매 맺게 해 주신다는 믿음에서 신앙의 넉넉함을 읽을 수 있습니다.

 

강 장로가 이 책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 '청지기 정신'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고 사람은 그것을 맡아서 관리하다가 하늘나라로 간다는 이 정신은 크리스천으로서 가져야 할 당연한 자세이기도 합니다(81쪽). 하지만 실제 이 청지기 정신으로 살아가는 교인들이 생각처럼 많지 않습니다. 청지기 정신은 우리가 세상에 사는 동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려고 할 때 꼭 필요한 것임을 여러 곳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런 신앙 교육을 위해서 평신도 신학 공부 프로그램(갈렙바이블아카데미)을 운영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가 삶의 과정에서 절실하게 느낀 것이 성경 말씀의 중요성이며 하나님의 동행하심이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 없이 이 어려운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참으로 용감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용감한 사람'은 '미련한 사람'의 반어법적 표현일 것입니다.

 

강덕영 장로는 '보수 꼴통'이라는 말이 듣기 좋다고 했지만, 그와의 만남을 통해서 또 그의 책을 통해서 느낀 바로는 '보수'이기는 하지만 '꼴통'까지는 아닙니다. 꼴통은 자기 고집이 강하고 다른 의견에 배타적이며 융통성이라곤 전혀 없는 성향의 사람을 가리킬 때 쓰는 단어입니다. 그는 적어도 그런 작은 사람이 아닙니다. 비록 절기 행사 때 교회에서 상행위(商行爲, 기관 수익 사업으로 농수산물을 판매하는 등의)를 하고, 드럼과 전자 기타가 예배당 본당에 자리하는 것을 탐탁치않게 여기고(101쪽), 예배 때의 의복 예절에 신경을 쓰는 것(105쪽) 등은 너무 개방된 시대 조류에 편승하지 않고 성령 충만했던 초대 교회로 돌아가야 한다는 그의 보수 신앙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정확히 뽑아보진 않았지만 이 책에서 가장 많이 나온 단어를 들라면 '기도'가 빠지지 않을 텐데, 이것도 그의 보수 신앙과 직결되는 것입니다. 기도할 수 있는데 무엇을 걱정하느냐고 얘기하니까요.

 

무엇보다 이 책의 장점은 쉬운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여린 사람이라도 전혀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아니, 불신자가 읽어도 이해에 무리가 없을 만큼 쉬운 문장들입니다. 탁월한 저술가는 남녀노소, 계급계층, 학식유무를 가리지 않고 누구나 읽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글을 생산해 냅니다. 그런 점에서 강덕영 장로는 뛰어난 저술가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소책자는 바른 신앙에 대해 꼭 알아야 할 많은 것들을 담고 있습니다. 신앙인의 모범 강 장로가 경험에서 습득한 내용들을 자신 있게 서술한 것들이어서 독자는 힘을 얻게 됩니다. 아무 때 어느 곳이든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이어서 더 친근감이 갑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읽고 은혜 받기를 바랍니다.

 

옥(玉)에 티 둘. 작은 거인의 풍모를 보이는 당당한 강 장로가 가끔 문장의 종결 어미에 그답지 않은 표현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그가 앞으로 좋은 책을 많이 출판해야 할 위치에 있기 때문에 하는 지적입니다. 가령 '~생각해 보았다', ' ~기도해 본다', '~된 것 같다' 등의 평서문 종결 어미가 자주 눈에 띕니다. 이런 어미는 자신감 결여의 뜻으로 받아들여질 소지가 있습니다. '~생각했다', '기도한다', '~되었다' 등으로 확신하는 종결어미를 사용하면 더 좋을 것입니다. 물론 저자는 겸손의 의미로 이렇게 표현했겠지만 독자 입장에서는 확신의 부족으로 받아들여질 소지도 없지 않습니다. 또 책의 체제에 대한 것인데, 머리말로 시작해서 에필로그로 끝맺고 있습니다. 머리말로 시작했으면 맺음말로 끝을 내야하고, 에필로그로 맺음 하고자 하면 프롤로그로 시작하는 것이 옳습니다. 이런 지엽적인 것을 서평에서 지적한다는 것은 이 책이 완벽에 가깝다는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신자뿐 아니라 불신자들에게도 일독을 권하면서 글을 맺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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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유감 - 현직 부장판사가 말하는 법과 사람 그리고 정의
문유석 지음 / 21세기북스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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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사방이 법의 굴레에 얽혀 있으면서도 법과는 무관한 듯 살아왔다. 아니 무관한 듯 살아왔다기보다 법을 의식하지 않고 살았다고 표현하는 게 더 맞겠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주위 평도 아마 이런 뜻으로 하는 말일 터이다. 하지만 아무 잘못한 일도 없으면서 '법'하면 본능적으로 움츠러드는 것은 왜인가. 죄의 이방지대에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법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목회를 하다 보니 여러 사람들과 관계하게 된다. 그 중 사회적 약자,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이 비교적 많은 편인데, 재판 중인 지인을 위해 탄원서를 작성할 일이 생겼다. 탄원서는 일정한 양식이 없이 선처를 바란다는 내용을 담으면 된다지만 그래도 법에 대해 조그마한 지식이라도 갖고 써야 할 것 같아 여러 날을 망설였다. 탄원서에는 진정성뿐 아니라 책임성도 따라야 하고 또 사회의 일반적 가치 척도에 어긋나지 않은 것이야 하기 때문에 더 신중을 기해야 했다.

 

그럴 즈음 내 눈에 들어온 것이 문유석 판사가 쓴 <판사유감>(21세기북스 출판)이라는 책이다.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진학하고 또 어렵다는 사법시험 통과해서 법관으로 있는 이가 무슨 유감이 있을까 싶은 생각이 언뜻 스쳤지만 딱딱한 법관의 건조한 글에서 탄원서 작성에 필요한 내용이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책을 펼쳤다.

 

요즘은 글의 시대가 아니고 말의 시대이다. 말만 잘 하면 어디서든 한 몫 할 수 있다. 시대의 발달로 미디어 산업이 상승세를 타고 있는 것이 이런 흐름을 형성하지 않았나 싶다. 그러니 글쓰기는 그렇게 중요한 영역이 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말은 이내 사라지는 것이지만 글은 반영구적이다. 오래도록 남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가지고 있다. 글쓰기의 중요성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이유가 여기에 있다.

 

<판사유감>은 젊은 부장판사가 법원에 종사하면서 느낀 감상을 적은 글이다. 저자 소개에서 밝히고 있듯이 '판사유감'의 원 뜻은 재판을 하면서 느낀 소회를 적은 것인데, 또 달리 판사라는 직업에 대해 서운한 마음을 표현한 글이기도 하다. 후자의 의미라면 '遺憾(유감)'이란 한자 말이 더 적당할 것이다. 법관들의 세계는 우리 일반 시민들과는 다른 곳이어서 미처 접할 기회가 없었지만 이 책에 정리한 글들은 이미 글쓴이가 법원 내부 게시판에 올려 큰 호응을 얻은 글들과 또 일부는 '법원회보' 등 이미 언론에 소개된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는 검증된 글쟁이인 셈이다.

 

법관은 냉철한 이성을 바탕으로 법률에 근거해 공정하게 판결을 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서 따뜻한 마음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일 상 싶다. 그러나 나는 문유석 판사의 <판사유감>을 읽는 내내 입에는 웃음기, 마음엔 따뜻함을 누릴 수 있었다. 법관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는 공유 의식이라고 할까, 큰 범주에서의 동류의식이라고 할까, 이것을 한 마디로 말하면 '친근한 법관'쯤으로 정의할 수 있겠다.

 

하얀 표지에 제목의 검정 글씨, 표지 상단 '현직 부장판사가 말하는 법과 사람 그리고 정의'라는 책 내용을 압축한 소개, 거기서 '법', '사람', '정의'라는 단어를 청색으로 포장하지 않았다면 천상 칙칙한 심상의 법원에서 고리타분한 법조문을 갖고 판결을 내리는 법관을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세 단어의 파란 색상은 그런 어두운 법조 타운의 보수성에 반기를 들어보겠다는 몸짓으로 내게 비춰 관심을 갖게 했다.

 

프롤로그에서 에필로그에 이르기까지 200쪽 중반의 분량이다. 1부 '사람을 배우다' 그가 판결을 통해 사람들을 만나면서 느낀 감정을 군더더기 없이 써 내려간 글이다. 특히 서울중앙지법 파산부에 근무할 때 만난 빚쟁이들의 막다른 인생 사연을 판사의 눈을 통해 그대로 클로즈업하고 있는 내용들이다. 동병상련에서 갖는 읍소형 글이 아니고, 그렇다고 문학으로 승화시킨 서민의 애환도 아닌, 판사를 통해 객관적으로 조명되는 인생 실패자의 모습 속에서의 온정을 느낄 수 있는 내용이어서 훈훈함을 느낄 수 있었다.

 

2부 '판사, 세상을 배우다'는 법조 사회를 세상과 비교한 글들로 채워져 있다. '초임부장일기'라는 제목으로 법관 게시판에 연재했던 글들 같은데, 그의 생각과 삶이 소롯이 들어난다. 위계질서가 분명한 법조문화에 대해 돌직구가 아닌 애교섞인 이의 제기로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마음을 사로잡는다는 것은 동의를 받아낸다는 뜻이다. 고정된 조직문화는 제3자의 눈에 쉬 드러나는 법이다. 그러나 문유석은 자기 조직의 꽉 막힌 부분을 유머러스하게 잘 기록하고 있다.

주심과 배석 판사의 관계는 재판정 밖에까지 이어지는데, 그는 세 사람을 '묵언 수행' 또는 '삼각편대'라고 표현했고, 회식 자리에서 상급자에게 무릎 꿇고 술 따라 올리는 것을 '영정 사진'에 비유한 것도 재미 있었다. 사생활도 없이 야근하며 밤낮 재판에 매달리는 것의 부당함도 외칠 줄 아는 지극히 현실적인 그의 시야가 밉지 않은 것은 그의 이런 행동이 고정된 법조 문화의 변화를 바라는 마음의 결과 때문일 것이다. 법관은 사실을 밝혀내는 직업군에 속한 사람이다. 당연히 그들이 생산해 내는 글도도 사실적인 글들이다. 하지만 문유석 판사의 글은 그것 너머 있기 때문에 독자의 눈을 잡게 된다. 그를 열린 마인드를 가진 법관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지은이 문유석 판사는 본인 스스로 말하고 있듯이 글쓰기 재주가 특출한 사람이었다. 내가 보기엔 그것은 타고난 재주가 아니라 후천적 노력의 산물인 것 같다. 어릴 때부터 동서양의 고전 등 많은 독서량을 확보하고 있었고 그것을 토대로 글쓰기를 즐긴 것 같으니까 말이다. 그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노동 등 각 방면에 해박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의 글에서 눈치챌 수 있었으며 특히 한 외고(外高) 특강에 가서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 중 첫 번째로 든 것이 인류의 문화유산인 고전을 읽는 것을 권하고 있는데, 이것은 본인이 경험하지 않고는 말할 수 없는 부분이다.

 

요즘 출판 추세가 책을 만들면서 추천을 받는 것이다. 자기 과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 방면에 아니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명망가들을 추천인으로 내 세우기도 한다. 젊은 부장 판사가 출판하는 책이라면 그가 속해 있는 법원장 나아가 존경하는 원로 법관의 추천사를 받을 법도 한데, 그게 아니었다. 보수적 법조 사회와 어울리지 않게 그는 문화심리학자,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뮤지션 등 자기 분야의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유명세를 크게 타고 있다고도 볼 수 없는 세 사람의 추천 글을 받아 실었다. 하지만 이들은 진정 글쓴이가 추구하는 정신 세계를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다.

 

변화는 소수의 사람에게서 시작되는 것이다. 나는 문유석 판사의 글을 읽으면서 큰 바위를 들겠다고 자기만큼의 무게가 나가는 지렛대를 준비하는 선구자를 보는 듯해 즐거웠다. 변화를 극히 싫어하는 법조 문화라고 알려져 있다. 조금만 드러나는 언행을 해도 '혼자 잘 났냐'는 사시(斜視)의 눈들이 매섭게 노려본다. 하지만 시류의 변화에 예외 영역은 없다. 법조계도 마찬가지이다. 문유석 판사를 비롯해 젊고 실력 있는 이들로 인해 육중한 바위에 서서히 균열이 가기를 바란다.

 

문유석의 글은 무엇보다도 판사의 손에서 보기 힘든 따뜻함이 배여 있다. 그 따뜻함은 자기를 드러 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 땅의 서민들과의 교류에서 전해지는 따뜻함이어서 더 의미가 있다. 법관은 판결로 모든 것을 말한다지만 나는 문 판사에게 판결문 이외의 글로 자신을 말하고 사람을 말하고 세상을 말하기를 권하고 싶다. 그는 분명 재판정을 따뜻하게 만드는 사람이다. 이 책에서 그것을 느낄 수 있다. 따뜻한 판사와 재판정은 법의 규제와 보호를 받고 있는 모든 국민이 바라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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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천성결교회 이명재 목사입니다. 저희 교회는 김천 외곽에 자리하고 있는 농촌 교회입니다. 노인 분들과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성도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작은 교회입니다. 저희 교회가 전도 대상으로 하고 있는 마을은 약 250호 되고요, 믿지 않는 지역 주민들과의 관계 형성을 위해 `교회문고`를 운영하려던 참이었습니다. 제가 그동안 모은 책을 중심으로 문고를 꾸미려고 하는데, 옛날 책이 다수를 차지해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알라딘에서 작은 교회 지원 프로젝트가 있다고 해서 신간 보충 차원에서 신청하게 되었습니다. 저희 농촌 지역의 독서열을 높이는데 이바지하기 위해 저희 교회가 선택되면 참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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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서대학교가 있는 천안으로 향했다. 그 대학에서 교회사로 박사Ph. D)과정을 밟고 있는 이명재 목사를 만나기 위해서이다. 그는 김두관과 교유한 지가 거의 20년이 되었다고 한다. 80년대 중반 민주통일문중운동연합의 서울 지부 성격인 서울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서울 민통련)에서 김두관이 사회국장을 맡고 있을 때, 이명재는 조직국장을 맡아 함께 활동했다. 20년 지기 이명재에게 김두관이 재야 활동을 했던 청년 시절과 정치인으로서 장년기에 접어든 지금 달라진 것이 없는가를 물었다. 이명재의 답변이다.

 “재야활동을 거쳐 정치계로 입문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대부분 제도 정치권으로 흡수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존 정치인보다 더 정치적으로 변하기도 해요. 김두관은 변화가 없어서 좋아요. 젊은 시절 그 이상적 인간관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사람이 김두관입니다. 인정이 메말라 가는 시대에 장관까지 지낸 사람이 인간적 따뜻함을 그대로 갖고 있다는 것은 그의 큰 자산입니다.”

김두관은 젊은 시절, 재야단체에서 활동할 때도 사람들을 잘 모으는 장기를 가지고 있었다. 시위 현장에서 사람들을 모아 선동을 해서 시위의 불을 지피곤 했다. 구속될 각오가 되어 있지 않으면 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 당시 활동가들은 이론엔 강하고 실천엔 약한 모습을 보였는데 김두관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80년대 중반 운동단체들이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으로 모여 활동했을 때의 서울민통련의 역할에 대해 물었다. 이명재는 많은 활동 중 87년 대선 국면에서의 단체가 분열된 뼈아픈 경험을 되살리며 자세하게 설명했다. 87년 대통령 선거는 운동단체들을 갈래갈래 찢어 놓았다. 아마 정치에 종속된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던 운동단체의 속성을 그대로 드러낸 결과가 아닌가 한다. 김대중 지지의 비판적 지지파, 겉으로 드러내지는 못했지만 김영삼 지지의 후보단일화파 그리고 백기완 민중후보를 지지하는 독자후보파로 대부분의 운동단체가 3분 되고 있었다.

서울민통련도 예외일 수 없었다. 김병걸(문학평론가. 경기공전 교수) 정동익(동아일보 해직기자. 현 4.19동지회 회장)을 중심으로 비판적 지지 입장을 표명했고, 이재오(현 한나라당 최고위원). 조춘구(환경관리공단 전 총무이사)를 중심으로 후보 단일화를 주장했다. 서민통 회원 중 일부는 독자후보를 주장하며 백기완 지지 집회에 앞장 섰다. 가슴 아픈 것은 이 때 운동권에도 우리의 고질인 지역주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점이다. 호남 쪽 회원들은 대부분 김대중 비판적 지지, 영남 쪽 사람들은 후보단일화 그리고 일부 회원이 민중의 계급성을 주장하며 백기완 독자후보 쪽으로 나누어졌던 것이다.

서민통에서 후보단일화를 주장했던 사람들이 새롭게 서울민중연합 민족학교를 조직해서 독자적으로 활동했다. 이 때 서울민중연합 의장과 부의장을 맡았던 이재오 조춘구는 뒤에 몇몇 운동권 출신 인사들과 함께 김영삼 정권의 신한국당에 입당함으로 제도 정치권에 편입되었다.

운동권의 분열의 역사를 들으며 기독교계의 분열 역시 지방색이 짙게 깔려 있음을 생각했다. 1953년 기장과 예장이 나누어졌다. 자유주의를 막기 위해서라는 신학적 명분을 들었지만, 주로 평안도와 함경도 사람들이 출신 지역을 중심으로 나뉘어졌음을 부인할 수 없다. 1959년에는 예장이 합동과 통합으로 분리된다. 에큐메니컬(교회일치) 운동에 대한 입장 차이가 분리의 직접적 원인이라고 하지만, 이것도 이북과 이남 출신의 목회자들이 신학적 노선 차이에 앞서 지역성을 중심으로 나뉘어졌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그리고 다시금 1979년에 예장 합동 측이 주류와 비주류로 나뉘어지는데, 문서설의 수용 여부가 신학적 분리의 원인이 되었다고 하지만 결국 영남과 호남의 분리로 평가되고 있다. 이렇게 지방색에 근거한 분열이 각 부문에 깊숙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운동권에서 활동했던 이명재가 목회자가 되어 있다는 사실이 궁금하게 다가왔다. 이명재는 동구의 사회주의권이 붕괴되고 소련이 해체된 후, 운동권 전체가 사상적 공황상태에 빠졌었다고 한다. 그 당시 운동권을 사상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것은 사회주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회주의의 인간에 대한 긍정적 가치가 자본주의 사회를 교정하는 데 도움틀로 작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사회주의권의 붕괴는 많은 운동권 실천가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이명재도 마찬가지였다.

그럴 즈음, 큰 교통사고로 1년 가까이 병원에 입원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실 학생 시절부터 이명재는 신앙보다는 운동에 더 열심이었다고 한다. 신앙생활을 하기는 했지만 목회의 길은 전혀 생각지도 않았다. 그런 와중 믿음 좋은 집안의 아내를 만났고, 주위 사람들의 간절한 기도로 병원에서 신학대학원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작용해서 그를 목회의 길로 들어서게 한 것이다. 그는 장모님(양구교회 이금녀 권사)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고 했다. 장모님이 사위 이명재의 목회 길을 열어달라며 10년 작정 기도를 하다가 7년만에 소천하셨다고 한다. 그 장모님의 유언을 받들어 별 준비 없이 신학대학원 시험을 보았는데 하나님의 실수로 합격되어 목회자가 되었다며 너털웃음을 짓는다.

그가 목회를 하고 있는 옥천 소서교회는 두메산골 교회로 알려져 있다. 두메산골의 작은 교회에서 활발한 선교를 한다고 해서 신문에서 몇 번 소개되어 교단에서는 꽤 알려져 있는 교회라고 한다. 그는 그곳에서 100여명의 농촌 주민을 섬기며 기쁨으로 목회를 하고 있다. 일찍 부모를 여읜 이 목사 부부가 친부모를 모시는 마음으로 마을 노인들을 섬긴 결과 주민들 대부분이 교회에 나와 재미있게 신앙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목회를 하면서 이명재 목사는 지역운동의 부름도 거부하지 않았다. 옥천신문에 가끔 쓰는 칼럼을 통해 옥천지역에 알려진 이명재는 종종 그 지역 활동가들과 만나 시국을 논했다. 2006년 지방선거에서 옥천지역 후보정책 검증단 위원으로 활동했다. 선거가 끝난 직후 정책 검증단에 참가했던 지역의 31개 단체로 의정 군정 감시단체인 “옥천살림지킴이”를 새로 조직해서 이명재 목사가 대표를 맡고 있다. 지방자치의 발전이 온전한 민주주의 발전을 가져온다는 지론을 가지고 주민들의 분발을 독려하고 있다. 자연스럽게 지방자치에 이론과 경험을 겸비한 김두관과 자주 만나 의견을 교환한다. 현재의 상황에서 지방자치가 활성화되기 위해서 국민들이 어떻게 준비해나가야 할 것인가를 함께 고민하며 그 타개책을 강구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연이 되어 현재 호서대학교 대학원에서 교회사 전공으로 박사학위(Ph. D) 과정을 밟고 있는 이명재는 일제시대 독립운동가들 중에 기독교인들이 많은데, 그들의 독립운동 과정에서 기독교가 미친 영향에 대해 연구하고 싶다고 했다. 이 땅에 기독교가 들어온 후 120여년이 지났지만 아직 기독교가 우리 사회에 끼친 공과에 대해서 명쾌한 답이 나오지 못하고 있다며 연구열이 불타오르는 그에게서 묵직한 결실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이명재 목사와 헤어진 후 전주로 달려가며 이명재와 같은 분들이 김두관의 주위에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지원과 자발적인 동지애를 보여주면 김두관의 미래가 훨씬 밝아지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울러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김두관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를 지지하는 마음이 한 정치인을 지지하는 것 훨씬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김두관이 어떤 사람이 되든지 간에 그는 복 있는 사람임이 분명하다. 그 복을 그가 획득했든지 아니면 하늘에서 내려주신 것이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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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재 2007-08-19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홍찬혁 이순희 공저 <내가 만난 김두관>에 실린 제 취재 기사를 원문 그대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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