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서대학교가 있는 천안으로 향했다. 그 대학에서 교회사로 박사Ph. D)과정을 밟고 있는 이명재 목사를 만나기 위해서이다. 그는 김두관과 교유한 지가 거의 20년이 되었다고 한다. 80년대 중반 민주통일문중운동연합의 서울 지부 성격인 서울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서울 민통련)에서 김두관이 사회국장을 맡고 있을 때, 이명재는 조직국장을 맡아 함께 활동했다. 20년 지기 이명재에게 김두관이 재야 활동을 했던 청년 시절과 정치인으로서 장년기에 접어든 지금 달라진 것이 없는가를 물었다. 이명재의 답변이다.
“재야활동을 거쳐 정치계로 입문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대부분 제도 정치권으로 흡수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존 정치인보다 더 정치적으로 변하기도 해요. 김두관은 변화가 없어서 좋아요. 젊은 시절 그 이상적 인간관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사람이 김두관입니다. 인정이 메말라 가는 시대에 장관까지 지낸 사람이 인간적 따뜻함을 그대로 갖고 있다는 것은 그의 큰 자산입니다.”
김두관은 젊은 시절, 재야단체에서 활동할 때도 사람들을 잘 모으는 장기를 가지고 있었다. 시위 현장에서 사람들을 모아 선동을 해서 시위의 불을 지피곤 했다. 구속될 각오가 되어 있지 않으면 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 당시 활동가들은 이론엔 강하고 실천엔 약한 모습을 보였는데 김두관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80년대 중반 운동단체들이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으로 모여 활동했을 때의 서울민통련의 역할에 대해 물었다. 이명재는 많은 활동 중 87년 대선 국면에서의 단체가 분열된 뼈아픈 경험을 되살리며 자세하게 설명했다. 87년 대통령 선거는 운동단체들을 갈래갈래 찢어 놓았다. 아마 정치에 종속된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던 운동단체의 속성을 그대로 드러낸 결과가 아닌가 한다. 김대중 지지의 비판적 지지파, 겉으로 드러내지는 못했지만 김영삼 지지의 후보단일화파 그리고 백기완 민중후보를 지지하는 독자후보파로 대부분의 운동단체가 3분 되고 있었다.
서울민통련도 예외일 수 없었다. 김병걸(문학평론가. 경기공전 교수) 정동익(동아일보 해직기자. 현 4.19동지회 회장)을 중심으로 비판적 지지 입장을 표명했고, 이재오(현 한나라당 최고위원). 조춘구(환경관리공단 전 총무이사)를 중심으로 후보 단일화를 주장했다. 서민통 회원 중 일부는 독자후보를 주장하며 백기완 지지 집회에 앞장 섰다. 가슴 아픈 것은 이 때 운동권에도 우리의 고질인 지역주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점이다. 호남 쪽 회원들은 대부분 김대중 비판적 지지, 영남 쪽 사람들은 후보단일화 그리고 일부 회원이 민중의 계급성을 주장하며 백기완 독자후보 쪽으로 나누어졌던 것이다.
서민통에서 후보단일화를 주장했던 사람들이 새롭게 서울민중연합 민족학교를 조직해서 독자적으로 활동했다. 이 때 서울민중연합 의장과 부의장을 맡았던 이재오 조춘구는 뒤에 몇몇 운동권 출신 인사들과 함께 김영삼 정권의 신한국당에 입당함으로 제도 정치권에 편입되었다.
운동권의 분열의 역사를 들으며 기독교계의 분열 역시 지방색이 짙게 깔려 있음을 생각했다. 1953년 기장과 예장이 나누어졌다. 자유주의를 막기 위해서라는 신학적 명분을 들었지만, 주로 평안도와 함경도 사람들이 출신 지역을 중심으로 나뉘어졌음을 부인할 수 없다. 1959년에는 예장이 합동과 통합으로 분리된다. 에큐메니컬(교회일치) 운동에 대한 입장 차이가 분리의 직접적 원인이라고 하지만, 이것도 이북과 이남 출신의 목회자들이 신학적 노선 차이에 앞서 지역성을 중심으로 나뉘어졌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그리고 다시금 1979년에 예장 합동 측이 주류와 비주류로 나뉘어지는데, 문서설의 수용 여부가 신학적 분리의 원인이 되었다고 하지만 결국 영남과 호남의 분리로 평가되고 있다. 이렇게 지방색에 근거한 분열이 각 부문에 깊숙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운동권에서 활동했던 이명재가 목회자가 되어 있다는 사실이 궁금하게 다가왔다. 이명재는 동구의 사회주의권이 붕괴되고 소련이 해체된 후, 운동권 전체가 사상적 공황상태에 빠졌었다고 한다. 그 당시 운동권을 사상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것은 사회주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회주의의 인간에 대한 긍정적 가치가 자본주의 사회를 교정하는 데 도움틀로 작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사회주의권의 붕괴는 많은 운동권 실천가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이명재도 마찬가지였다.
그럴 즈음, 큰 교통사고로 1년 가까이 병원에 입원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실 학생 시절부터 이명재는 신앙보다는 운동에 더 열심이었다고 한다. 신앙생활을 하기는 했지만 목회의 길은 전혀 생각지도 않았다. 그런 와중 믿음 좋은 집안의 아내를 만났고, 주위 사람들의 간절한 기도로 병원에서 신학대학원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작용해서 그를 목회의 길로 들어서게 한 것이다. 그는 장모님(양구교회 이금녀 권사)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고 했다. 장모님이 사위 이명재의 목회 길을 열어달라며 10년 작정 기도를 하다가 7년만에 소천하셨다고 한다. 그 장모님의 유언을 받들어 별 준비 없이 신학대학원 시험을 보았는데 하나님의 실수로 합격되어 목회자가 되었다며 너털웃음을 짓는다.
그가 목회를 하고 있는 옥천 소서교회는 두메산골 교회로 알려져 있다. 두메산골의 작은 교회에서 활발한 선교를 한다고 해서 신문에서 몇 번 소개되어 교단에서는 꽤 알려져 있는 교회라고 한다. 그는 그곳에서 100여명의 농촌 주민을 섬기며 기쁨으로 목회를 하고 있다. 일찍 부모를 여읜 이 목사 부부가 친부모를 모시는 마음으로 마을 노인들을 섬긴 결과 주민들 대부분이 교회에 나와 재미있게 신앙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목회를 하면서 이명재 목사는 지역운동의 부름도 거부하지 않았다. 옥천신문에 가끔 쓰는 칼럼을 통해 옥천지역에 알려진 이명재는 종종 그 지역 활동가들과 만나 시국을 논했다. 2006년 지방선거에서 옥천지역 후보정책 검증단 위원으로 활동했다. 선거가 끝난 직후 정책 검증단에 참가했던 지역의 31개 단체로 의정 군정 감시단체인 “옥천살림지킴이”를 새로 조직해서 이명재 목사가 대표를 맡고 있다. 지방자치의 발전이 온전한 민주주의 발전을 가져온다는 지론을 가지고 주민들의 분발을 독려하고 있다. 자연스럽게 지방자치에 이론과 경험을 겸비한 김두관과 자주 만나 의견을 교환한다. 현재의 상황에서 지방자치가 활성화되기 위해서 국민들이 어떻게 준비해나가야 할 것인가를 함께 고민하며 그 타개책을 강구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연이 되어 현재 호서대학교 대학원에서 교회사 전공으로 박사학위(Ph. D) 과정을 밟고 있는 이명재는 일제시대 독립운동가들 중에 기독교인들이 많은데, 그들의 독립운동 과정에서 기독교가 미친 영향에 대해 연구하고 싶다고 했다. 이 땅에 기독교가 들어온 후 120여년이 지났지만 아직 기독교가 우리 사회에 끼친 공과에 대해서 명쾌한 답이 나오지 못하고 있다며 연구열이 불타오르는 그에게서 묵직한 결실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이명재 목사와 헤어진 후 전주로 달려가며 이명재와 같은 분들이 김두관의 주위에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지원과 자발적인 동지애를 보여주면 김두관의 미래가 훨씬 밝아지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울러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김두관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를 지지하는 마음이 한 정치인을 지지하는 것 훨씬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김두관이 어떤 사람이 되든지 간에 그는 복 있는 사람임이 분명하다. 그 복을 그가 획득했든지 아니면 하늘에서 내려주신 것이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