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흔적
이윤기 지음 / 문학사상사 / 2000년 8월
평점 :
절판


아까 지나쳐 온 길이 자꾸 생각나고 아쉬운 건 그 길을 가지 않았기 때문... 이 책을 읽고 이런 글이 떠오른다. 금단의 열매가 더 먹고 싶은 것은 그것을 먹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 아닐까. 다분히 심리적인 원인이라는 얘기다. 작가도 그렇고, 이 책의 말미에 있는 다른 사람의 평도, 금지하는 것에 대한 욕망의 갈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너무 강해서 이 작품을 읽고 그것을 느끼고, 이렇게 생각해! 하고 강제하고 있는 기분이다.

내 감상을 간단히 쓴다면, 이렇다. 이책은 '나'의 인생에 관여되어 있는 타인들과의 삶이 주는 흔적들을 쓴 것이 아닐까. 세월이 지나 그러한 것들은 그리움이 되었다. 당시에는 감당키 어려운 번민을 주었고 나의 인생 행로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지만. 왜 그리움이 되었을까. 나는 그것을 갖고는 싶었지만 바람으로 끝났다. 그런데 그것은 내가 갖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내가 생각했던 것이었다. 그것을 갖지 않은 것이 아쉽고 후회는 된다. 그러나 인생은 그런 맛도 있어야 한다. 뒷맛이 없으면, 남은 나날들을 살기가 맥 빠지지 않겠는가.

이런 감상을 받은 원인은 서두에 나오는 사슴의 이야기 때문일 가능성이 짙다. 사냥꾼에게 쫓기어 갑자기 나에게 나타난 사슴. 사슴을 도와줄 것인가, 사냥꾼을 도와줄 것인가? 갑자기 나의 삶에 뛰어든 어떤 대상 때문에 나의 삶에는 파문이 인다......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수많은 만남이라는 말이 있듯이 삶은 타인과의 만남으로 인해서 변화가 생긴다. 작품 속 주인공의 추억, 갈등도 바로 만남에서 비롯된 것이지 않은가.

한 작품은 여러 느낌으로 읽힐 수 있으므로 나의 감상이 주제를 벗어난 것이라고만은 탓할 수는 없으리라. 오히려 다양한 각도로 해석이 가능한 작품을 쓴 저자에게 찬사를 보낸다. 오랜만에 좋은 작품-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을 읽었다.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등장인물들의 대화문이었다. 간결하고 절제된 것이 영화를 보고 있는 듯한 생동감을 줬다('영화같은 소설'을 폄하하는 사람이 있으나 나는 이런 비쥬얼한 것을 선호한다). 간결하지만 행과 행 사이에 무수히 감추어져 있는 이면의 것들을 생각게 했다. 세세한 묘사는 상황을 파악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상상력을 한정해버리는 단점이 있다.

소설은 독자 나름대로 상상하는 여지가 있는 재미로 읽는다면, 본 작품은 그런 미덕을 갖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정말 훌륭했다. 저자가 '장미의 이름'이라는 만연체의 축축 늘어지는 작품을 번역했던 사람과 동일인이라는 것이 믿끼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곳곳에서 발견되는 문어체의 한자어가 땅 위에 드러난 지뢰처럼 여겨지는 점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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