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의 노래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김훈의 소설 <현의 노래>는 잊혀진 봉우리다. 그의 이름을 왈칵 도드라지게 만든 <칼의 노래>가 2001년에 쓰여지고 난 후 3년, 작가는 잘 벼린 칼을 떠나 옛 나라 가야의 악기에 매혹된다. 그러나 서늘한 악기의 울림이 어디 장대한 주전파와 주화파의 갈등을 감내하겠는가. 다시 3년을 기다려 나온 <남한산성>은 말 그대로 산성을 품음직한 이 나라 문학사의 준령이 된다. 그리고 그로 인해 <현의 노래>는 잠시 잊혀졌다. 악공 우륵의 열두 줄 새 금(琴)이 우리에게 그렇게 잊혀진 것처럼. 대밭을 헤집고 사라지는 가을 바람처럼.

남해의 바다에서 적을 만났던 작가는 이제 낙동강 하류의 고토에서 또 다른 상대와 대치한다. 이순신의 적은 눈 앞의 왜적이기도 했으나 또한 임금이기도 했고 명의 장수이기도 했다. 베어지지 않는 수많은 모순과 회의는 그의 순결한 칼 아래 오직 적으로 남았다. 그 적이란 어차피 도륙해서 쓸어버릴 수도 없는 강고한 무엇이기도 했다. “내가 적을 이길 수 있는 조건들은 적에게 있을 것이었고, 적이 나를 이길 수 있는 조건들은 나에게 있을 것이었다. 임진년 개전이래, 나는 그렇게 믿어왔다.”

<현의 노래>에서 주인공이라기 보다는 관찰자이며 기록자처럼 보이는 우륵은 칼의 외향성이 아닌 금(琴)의 내성적 성격에 주목한다. 그의 악기는 생명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지위의 높낮이를 떠나 피폐한 생명들이 기거하는 옛 고을들의 경계를 자유롭게 떠돌며 가야의 흥망성쇠를 지켜본다. 작가는 악기의 대척점에 쇠로 만든 병기들을 배치함으로써 대비감을 돋보이게 했다. 악공 우륵과 견주어지는 인물로 대장장이 야로를 선택하고, 그의 정치적 행보를 집중 조명한다. 가야의 장인으로 적국인 신라에 새로 벼린 무기를 제공하면서 이렇게 합리화하는 것이다. “쇠붙이는 주인이 따로 없다. 쇠붙이는 지닌 자의 것이다.” 묘하게도 이건 우륵의 금(琴)이 내는 소리와 맥락이 닿는다. 신라 병부령 이사부를 만난 우륵은 주인이 없으니 소리와 병장기가 같은 것이냐는 물음에 이렇게 답한다. “소리는 없는 세상을 열어내는 것인데, 그 세상은 본래 있는 세상인 것이오.”

<남한산성>의 촘촘한 드라마에 몰입된 독자라면 <현의 노래>의 서사 구조가 자못 심심한 것일 수도 있겠다. 죽음을 앞둔 가야 왕의 순장 모습으로 시작된 작품은 악공과 대장장이의 모순된 삶을 통해 당대의 정치상황을 짚어낸다. 쇠 위에 죽은 몸을 누이며 생을 마감하는 왕들은 쇠의 지배자를 자처했으나, 그 쇠의 배반으로 나라는 스러질 뿐이다. 한편 신라 장수 이사부는 제도권 안의 권력과 무력의 중핵으로 우륵과 야로를 겪어내면서 가야를 들여다 본다. 그와 갈등구조를 형성하는 인물이 없으니 흐름이 간혹 담담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 담채화적인 고즈넉함은 정작 현(絃)과 금(琴)의 본디 모습이 아니던가. 그게 <현의 노래>의 미덕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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