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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발의 순간을 기다리며 나는 몇몇의 작가들을 지켜본다. 그들은 언젠가 폭발하고 팽창하는 우주를 만들 것이다. 

   크리스 반 알스버그. 무슨 일을 저지를 거야?

   그의 책들은 종종 기쁨을 선사하고 그 후엔 허탈함을 몰고 왔다. 그의 뛰어난 발상들은 점점 더 밝아지다 최고로 빛을 발하기 전에 사라지는 별처럼 아쉬웠다. 리버벤드는 어떨까?

   꿈, 환상, 발상. 그것을 책으로 옮겨오는 대담한 시도에 또다시 놀라다. 첫 장을 펼치자 이번엔 막 산 색칠공부 책이다. 채색되지 않은 윤곽선으로만 이루어진 어느 마을의 풍경. 이곳이 리버벤드다. 오는 사람도 가는 사람도 없는 기묘한 평화로움, 기묘한 고요가 흐르는 마을. 몇 장을 넘기면, 소름끼치는 광경이다. 여전히 윤곽선으로만 이루어진 하얀 사람들. 그러나 이곳에 굴러들어온 역마차, 이전엔 한 번도 선 적 없는 역마차를 휘감고 있는 것은 무심하고 광포한 크레파스 자국이다. 색이라고는 없는 마을에 (수상스런 빛이 번쩍하고 나서) 색이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꼬불꼬불한 밧줄과 뻣뻣한 철사"의 형태로 사물을 옭아맨 올가미로서. 이 올가미의 정체를 밟아가는 보안관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림 한 장에 상황 하나가 있어 마치 그 그림들 각각이 하나의 챕터인 것처럼. 마치 여러사람이 한 부분씩 지어내서 만들어내는 한 편의 이야기처럼.

  이야기는 멋대로 흘러간다.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윤곽선 마을'의 충격은 가시고, 이성이 눈을 뜬다. 이 책 또한 그의 다른 책들이 그러하듯 너무 수사학적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며,

  '기법은 놀랍지만 어쩐지 이야기가 허술한데?' '어쩐지 구심점이 없는 것 같아.', '쓸데 없는 장면이 너무 많아.', '이야기가  너무 상투적인거야 아님 아무것도 구상하지 않은거야?', '아무리 그림책이라지만 서사가...'

  그런 생각을 하다 책의 마지막 장에 도달했을 때 갑자기... 그림 위로 크레용을 쥔 어린이의 손이 등장한다. 폭소가 터진다. 이런! 이것은 서사의 고급스러움 따위는 아예 생각할 필요도 없는 진짜 "그림책-색칠공부책"이잖아. 나는 마치 이제껏 그가 딴청 피우고 엉터리로 지어내던 이야기에 정신이 팔렸던 것이다. 

  나는 그것을 기대했던 것이다. 그림이 아니라 그림책이라면 당연히 매력적인 이야기와 더불어 있어야 한다고 그렇게 믿었건만 그런 잣대로 크리스 반 알스버그의 책을 보는 동안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이다. 그렇다면 그에게서 이야기는 기대할 필요가 없는 것일까? 아니, 그는 이야기가 더 이상 이야기의 구조 안에만 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자기 나름의 방식을 끝없이 시도하는 작가가 아닌가 싶다. 나는 또다시 어떻게 그의 이야기에 속아 넘어갈지 기대된다. '리버벤드의 이상한 마을'을 내가 본 중 가장 멋진 작품으로 꼽는 것은, 그가 트릭이랄 것도 없는 트릭을 써서 내 믿음을 흔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이 작가가 사랑스럽다. 그러나, 나는 또다시 재촉하겠지. 무슨 일을 저지를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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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은 빠르게 지나가고 있다.

너는 여름에게 "가. 가. 가."라고 재촉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서 달력을 보았다. 거기서 8월은 지나가지 않았다. 아주 긴 하루처럼, 아주 긴 순간처럼, 멈추어 있었다.

나는 멍하니 앉아있다 다시 8월을 보낸다.

나는 여름에 무얼하고 있지? 책을 한 권 읽었고 또... 

8월 중의 며칠은  <바람의 그림자>를 메고 다녔고, 며칠은 그 책을 읽었고, 며칠은 그 책의 뒷장에 편지를 썼고, 며칠은 그 책을 떠나보내려고 했다.

<바람의 그림자>에서 다니엘 셈페레를 만났다. 그에게서 나를 본다. 소설을 읽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누군가의 과거를 깊숙히 파고드는 아이. 그리고 그는 소설 속에 '있게' 된 운명 덕에, 화자라는 역할에 발목 잡힌다.

다니엘은 말한다. 그는 듣고, 그의 귀는 확성기처럼 그가 듣는 소리를 다시 뿜어낸다.

다니엘은 기억한다. 그는 뭔가를 기억하고, 그의 기억들은 이 책을 읽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전달된다.

그는 전달자이다.

나는 여기 글을 적고 있음으로써 다니엘의 기억을 전달하는 화자가 된다.

나는 발목 잡혔다고 생각했다. 내가 왜 너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지? 나는 네 기억에서 먼지를 털어내고 윤기를 내고, 가장 값진 것의 이름을 붙이며 슬퍼했다. 내 기억도 아닌 것을! 그런 역할을 맡게 된 것에 화가 났다. 

그리고 오랫동안 '기억'이니 '추억'이니 하는 말에 과민반응했다. 

"과거는 소멸되는게 아니라 다시끔 회생하지만 과거를 없애려는 음모는 늘 존재하기 마련이다." -보르헤스

보르헤스는 전쟁의 기억을 감추려는 음모에 대해 그렇게 말했지만, 나 자신은 내가 그에 필적하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렇다고 망각의 약을 만들어 보려 했던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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