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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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서의 화자 40대의 나(와타나베)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 약 3~4년간 있었던 자신의 경험을 회고 하고 있다. 와타나베는 불현듯 지난날의 기억을 되짚어보다 영원히 잊지 않겠다고 맹세했던 첫사랑의 얼굴이 아렴풋해진 것을 떠올리며 ‘영원이란 없다, 중요한 무엇인가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의미가 희석되기 마련이다.’라고 생각 한다.    

 

 소설에서 보여지는 몇몇 장면이나 그들의 대화. 행동들 중 이해가 되고 공감이 가는 부분도 있긴하지만 소설 전반에 걸쳐 등장하는 인물들-나(와타나베)를 포함하여 나의 어린시절 단짝, 그리고 영원히 나의 베스트 프렌드일 것만 같았던 기즈키, 그의 여자친구였던 그리고 나의 첫사랑이었던 나오키, 대학에서 새로 사귄 여자친구 미도리. 대학에서 만난 선배 나가사와. 그의 여자친구 하쓰미. 나오키의 요양원 룸메이트 레이코- 모두는 너무도 비현실적이면서 현실적인 인물들처럼 그려져 있다. 마치 내 옆에, 내 주변에서 직접적으로 만나지는 못하더라도 내 친구의 친구나 선후배 정도로는 만나볼 수 있을 듯한 캐릭터인데, 그러면서도 묘하게 모두가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일상적이기도 하면서 너무도 비일상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그들을 통해 주변인에 대한 상실감.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게 된다.    

 

 이것이 바로 20대의 초상이라면 너무 슬프다. 모두가 방황하고 어지러운 청춘들뿐인.
이들이 처했던 현실은 소설을 읽고 있는 나조차도 부정하고 싶을 정도이다. 
그렇기에 계속 '이건 너무 일본 색채가 강할 뿐이야.' 라는 생각을 하며 문화적 장벽을 쌓아올리게 된다.    

 

 

 그러나 수없이 ‘이건 허구야. 단지 허구일 뿐이야.’ 라고 되뇌일 수밖에 없었으면서도 책을 덮고 난 지금 이상하리만치 마음은 고요하기만 하니... 적어도 기억 속 20대 초반의 내 모습은 밝고 싱싱했기에, 이들처럼 끝데없는 나락에 떨어진 일은 없었으니 다행이라고 위안이라도 하고 있는것일까?    

 

 책 뒤에 전문가 쓴 서평 중, 하루키 소설의 어디가 그렇게 좋은가 하는 물음에 대해 "그 분위기 자체 - 소설 주인공의 삶의 양식이나 태도" 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내용이 있다. 한때 나도, 이러한 분위기의 일본 소설 속 주인공들이 보이는 삶의 태도(자신의 삶인데도 불구하고 적당히 거리를 두고 마치 방관자 처럼 인생을 살아가는)에 적잖이 매료된 적이 있었지만, 이들이 너무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뿐더러 적어도 내 삶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듯한 느낌에, 허무주의에 빠져 비슷비슷한 모습을 보여주는 캐릭터들에 염증이 나 한동안 일본 소설을 등한시 하기도 했었다.  

 

  

 대체 <상실의 시대>에서는 어떤 인물의 삶의 태도나 양식이 그렇게나 매력적이었을까?
인물 한 명 한 명 따져 생각해보아도...

없다.    

 

 화자인 나(와타나베)부터 시작해 소설에 등장하는 캐릭터 모두가 비정상적인 인물들로만 구성되어 있고 그들의 행동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지만, 공감이 가는 문장을 찾아내기란 어려운 일이 아닌 것은 오롯이 하루키의 필력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을 덮고 난 후의 느낌을 딱 한 문장만으로만 남긴다면. 

"문학과 외설은 그야말로 한끗 차이다"

내가 해야 할 일은 한 가지 밖에 없었다. 모든 사물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 것, 모든 사물과 나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둘 것. 그것뿐이었다. - 와타나베  

인생이랑 비스켓 통이라고 생각하면 돼. 비스켓 통엔 여러가지 비스켓이 가득 들어있고, 거기엔 좋아하는 것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게 있잖아? 그래서 먼저 좋아하는걸 자꾸 먹어버리면 그다음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만 남게 되거든. 난 괴로운 일이 생길때면 언제나 그렇게 생각해. 지금 이걸 겪어두면 나중에 편해진다고. 인생은 비스켓 통이라고. 난 경험으로 그걸 배웠거든. - 미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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