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온다 리쿠 지음, 박수지 옮김 / 노블마인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산 사람들의 세상은 흉악하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아무리 비참한 일이나 광기도 모두 산 사람들의 짓이다.
거기에 비해 죽은 사람들은 얼마나 평온한가. 과거에 살며 레이스 커튼 그늘이나 계단 어둑한 곳에서 숨죽이며 서성거리고 있을 뿐이니까. 그러니까 우리 집에서는 결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p.30)
 

공포소설은 초등학교 6학년 때 읽은 <오싹오싹 공포 체험>이라는 책 이후 처음이다. 찌르고 베고 피가 뿜어져 나오고, 갑자기 ‘꺄-아아아아!!!’ 하거나 ‘쿵!’ 하는 건 죽어도 싫어서 공포 영화를 본 것도 <식스센스>가 마지막. 그나마 식스센스를 보면서도 눈 감고, 귀 막은 게 반이었고 심지어 해리포터를 읽으면서도 이불 폭 덮어쓰고 볼 정도였다. 그런데 갑자기 왜 공포소설이 읽고 싶었던 것일까. 아마도 이제는 귀신 보다 사람이 더 무섭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귀신 등장쯤이야’ 하게 되어서일까?  

 이제 알았나? 나쁜 짓은 살아 있는 인간들이나 하지, 죽은 인간들은 오히려 더 착하다고. (p.184)
  

나한테 하는 말이야?
정말이다. 마땅히 죽어야 할 인간들이 두 다리 쭉 뻗고 잘 살고 있는걸 보면
'귀신은 착해빠졌거나, 능력이 없거나, 아니면 귀신이라는 게 애시당초 없거나 셋 중 하나일 것이다.’
라고 생각하게된건 얼마 되지 않는다.


소설은 솜씨 좋은 목수가 좋은 재료들로 지어 세월이 흐르고 또 흐르고, 거주자가 또 바뀌고 바뀌어도 여전히 그림책에나 나올 듯한 느낌의 언덕 위 이층집을 무대로 한다.
큰 사과나무 한 그루가 서있고 드문드문 토끼굴이 있는 정원, 넓은 창문으로 햇살과 꽃향기가 가득 들어와 절로 요리가 하고 싶게 만드는 주방. 그리고 흔들의자가 흔들흔들 하고 있는, 2층의 따뜻한 침실이 있는 이층집. 한동안 비어 있었지만 누군가의 숨결이 훑고 지나간 듯한 느낌이 드는 그런 이층집.

그런데 이 집에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바글바글거리며 동거를 하고 있다.

오븐에 사과파이를 굽는 동안 감자를 깎다가 서로를 찔러 죽인 자매, 갓난 아이와 함께 죽은 여인, 아내를 따라 사과나무에 목 매어 죽은 남편, 동네 아이들을 유괴해서 절인 고기를 만든 하녀, 통조림 병에 담기게 된 아이들...
끔찍하고 엽기적인 살인 사건 혹은 사고들로 유령이 된 사람들과 이들과 동거하게 된, 아직은 살아있는 소설가의 이야기가 10개의 단편으로 촘촘하게 얽혀 있다.


'피를 상상하게 만드는' 이야기들이 자주 등장하지만 그렇다고 중간에 책장을 덮게 만들지는 않는다. 굉장히 몰입하게 만드는 책이다. 다음에는? 또 다른 사람은? 하고 다음 편을 또 기대하면서 읽고 있다.
그리고 다행이도 소설의 말미에는 앞 부분의 잔혹했던 이야기들을 말끔하게 잊게 만들어주는 꽤 귀여운 구석들도 보인다.
유령들도 그저 살아있던 사람들일 뿐이라고 일깨워주듯.
자기 삶에서 내쫓기길 바라지 않기 때문에 고분고분 말 잘듣는 유령들.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을까요? 50억? 60억? 살아 있는 사람이 그만큼이면 죽은 사람들은 그보다 훨씬 더 많겠죠? 그 사람들은 어디에 있을까요? 어디서 살고 있을까요?
세상은 점점 더 겹겹이 쌓이고 있어요. 우리들은 끝없이 쌓여갈 거에요.
세상은 모두 우리들
이 되고, 세상은 모두 유령이 될 거에요,
이제 곧 세상은 우리들
의 시대가 되죠.
우리 집에 잘 오셨어요.
많은 기억들이 쌓인 우리들의 집에. (p.202)  


가끔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다.
고층이 생기기 시작한게 이제 반 세기. 지금 내가 살고있는 이 집은 내가 첫 세입자이니 이전에 이 집 터에 살았던 사람들은 분명 단층에 살았을텐데... 단층에만 살았던 옛 사람들의 영혼이 아파트 고층인 우리집에 까지 올라올 수 있을까...?
현기증 나서 아마 올라오진 못할꺼야.
그리고 안심.


그러면서도 사실 책을 읽는 동안 이불을 폭 덮어 쓰고 가끔씩은 방안을 두리번두리번 거리기도 했다.
과거에 이 집 터에 살았던 사람들이 내 옆에 바짝 붙어서 혹은 내 어깨너머로 이 책을 같이 읽고 있는 건 아닐까하고 생각하기도...
‘어때요? 이 책 재미있으셨나요?’


으. 뒷덜미 시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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