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작은 무법자
크리스 휘타커 지음, 김해온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생이 지랄맞은 이유는 제법 살만하다고 느낄 때쯤 뒤통수를 거하게 치기 때문이다. 부유하든, 똑똑하든, 아무리 신중하고 착한 성격이든 무엇이든지간에 나는 그 법칙에서 자유로운 사람을 본 적이 없다.

- 뭔가 보이거든 손을 드세요. 뭐든 상관없습니다. 건드리지도 마시고요. 손을 드세요.

 워커는 죽은 아이를 찾았다. 아이는 가장 친한 세 친구 중 하나의 동생이었다. 사고였다. 하지만 시체로 발견되었고 친구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가장 예뻤던 스타는 주점에서 노래를 불렀고 워커가 사랑했던 마사는 변호사가 되어 고향을 등졌다. 빈센트는 그 일로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워커는 이제 서장이 되어 자신의 병과 싸우며 스타와 아이들을 다독이고 빈센트가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게 준비해놓기도 하며 마을의 시시콜콜한 일들을 (효과는 없지만) 해결하려 노력하는 그저 그런 경찰일 뿐이다. 빈센트가 마을로 돌아왔을 때 워커는 그와 관중석에서 맥주를 마시고 미식축구를 보며 대화를 나눈다. 그렇지만 절친한 친구가 원래 자리로 돌아오는 것을 원했던 건 워커뿐이었을까? 스타가 총에 맞아 죽고 빈센트는 다시 구속되는 처지로 돌아간다. 스타가 죽게 되던 순간, 빈센트와 스타 외에 그 장소에 존재하던 사람이 있었으나 그건 충격을 먹고 기억을 잊어버린 아주 어린 아이 로빈일 뿐이다. 한편, 스타가 죽기 전 딸 더치스는 그동안 가족들을 위협해온 다크의 사업장에 불을 지르고 cctv 비디오를 훔쳐버렸고, 미혼모가 경제적 곤란을 겪으며 아이들과 살아가는 곳에 관심을 보이는 남자들은 너무 많았다. 워커 외에는 모두 빈센트가 범인이라고 생각하는 가운데, 더치스는 홀로 다크가 진범이라고 주장하는데 과연 사실일까?

 책을 읽는 내내 가장 미웠던 것은 다크도, 빈센트도 워커도 아닌 더치스였다.

언제나 어른들의 심기를 건드려 나쁜 아이로 낙인찍히게 만드는 더치스의 헛발질이 보기 힘들었고 무법자랍시고 내세우는 허세도 역겨웠다. 그런 감정은 책을 펼쳐서 소녀의 불행이 나열되는 내내 지속되었다. 소녀만 미운 건 아니었다. 잘못한 것도 없는 소녀의 동생도 거추장스러웠고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네 명의 어른들이 하는 행동이 모두 답답하고 싫었다. 모두가 피해자였고 서로를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살아가려고 애쓰는 동안 하등 도움되지 않았던 나는 독자라는 위치에서 쉽게 그들을 재단하고 경멸했다. 그리고 책을 덮고 나서야 그들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저 피해자가 될 수 밖에 없었던, 항상 이성적인 자신의 모습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기를 들어야만 했던 소녀를 어째서 그런 삐딱한 시선으로밖에 볼 수 없었을까. 방황하다가 강도에게 습격당하고 다시 재기하려나 싶을 때쯤 엄청난 손실을 기록해 다시 약에 빠져들고. 이건 빈센트나 워커의 이야기가 아니라 작가의 이야기였다. 스스로 치유하기 위해 써 내려간 이야기여서 그런지 이 소설은 사람이 늪 바닥에서 허우적댈 때의 기분을 아주 잘 느끼게 해준다. 타인이 모두 적으로 보이고 모든 말이 곱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내 인생의 수많은 고난들 중 남들은 헤매지 않을 간단한 문제조차 더 악화시키고 마는, ‘병신이라고 일컬어지는 존재 말이다. ‘병신상태의 사람은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때로는 최악이 될 선택을 하고 만다. 나는 그런 병신상태, 작가가 다시 약에 손을 대고 할아버지 댁에서 로빈이 겨우 안정을 되찾으려는 순간에 그 할아버지가 총에 맞고 다시 악몽이 재현되는 쳇바퀴 속에서 이 책을 읽었기에 도저히 이 모든 수렁의 끝에 완전히 행복한 결말이 없으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로빈이 죽거나, 소녀가 누명을 쓰거나, 아니면 진짜로 희생자를 만들고 감옥에 가거나 다크에게 놀아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상황에서 소녀의 발악은 더운 여름날 사람에게 달려들었다가 땅에 떨어진 날벌레를 신발로 짓이길 때 느껴지는 기분나쁜 감각으로밖에 와닿지 않았다. 나는 이 느낌을 잘 알았다. 내가 받아왔던 경멸과 혐오로 나는 어느새 나를 보고 있었다.

 이렇듯 교양보다는 욕설이 어울렸고 화사한 긴 생머리보다는 부스스하게 막 묶은 머리가 더 편안한 삶이었다. 뿌듯함보다는 수치스러운 경우가 훨씬 많았고 그럴 때마다 베갯잎을 적셔가며 내일은 꼭 죽어야지 다짐했다. 그러나 결국 이렇게 살아있게 되었다. 왜냐하면 어린 내 곁에 죽고싶을 때마다 살아야 할 이유를 가르쳐주는 어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딱히 가깝거나 내 인생을 바꿀 거대한 도움은 아니었다. 하지만 결코 작지 않은 도움들이었다. 스스로 쓸모없다고 여겼던 워커의 도움이나 막막해보였던 핼, 무심한 듯 위로가 되는 말을 해줬던 돌리, 계속해서 밀어내도 언제나 곁에 되돌아오는 상냥함이 되었던 토머스 노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일들로 가득한 이야기를 꾹 참고 끝까지 함께할 수 있게 해주었던 건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작가가 하고 싶은 말도 그런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또한 지나가리라같은 수박 겉핥기식 위로 따위가 아니라, 나는 이렇게 이겨냈다고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게 아니라 진짜 시궁창을 살아내서, 마침내 빠져나오는 사람의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야말로 그가 생각한 진짜 위로가 아니었을까. 내 삶은 사랑받는 공주님이나 잘 진열된 인형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삶이기에 나만이 가질 수 있는 굳은 살도 배겼으리라. ‘가난한 아이의 욕심은 용납할 수 없지만 부잣집 공주의 생떼는 사랑스러워 보이는어른들은 우리 사회 곳곳에 있다. 어떤 순간에는 그 날선 눈빛이 더치스가 들었던 돌보다도, 그렇게 해서라도 날을 세우려하는 것보다도 어찌나 날카롭고 아픈지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다가온다. 그러나 그 예리한, 때로는 동정을 가장해 속에 꽁꽁 숨겨야만 하는 저열한 악의들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의외로 삶은 아주 보잘 것 없는 것이 지탱한다. 아이들을 지켜주려던 어느 무능한 경찰의 고집, 그저 희생하는 길 밖에 몰랐던 남자의 침묵, 돌이킬 수 없는 잘못에 대한 끊임없는 반성, 회색 말... 그 보잘 것 없는 것들로도 삶은 살아진다. 그러니까 뻔한 이야기가 되더라도 우리 사랑을 나누자. 그깟 호의라고 비웃음 살 사랑이 얼마나 강한지 알아야 할 곳들이 세상에 너무나도 많다.

"아직 바로잡을 수 있어."
빈센트가 말했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지."
빈센트가 일어섰다.
"난 30년이나 늦어버렸는걸." - P65

소녀는 자기가 잃은 모든 것을 생각하며, 그리고 동생이 얻은 모든 것을 생각하며 울었다.
더치스는 유리창에 손바닥을 대고 동생에게 작별을 고했다. - P56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