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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 윌리엄스 단편선
조이 윌리엄스 지음, 서민아 옮김 / 기이프레스 / 2026년 2월
평점 :
제니에겐 기력도, 재능도 없다.
심지어 사랑에 쓸 힘조차 남아 있지 않다.
_199쪽
이 문장을 읽고 책을 덮었다. 잠깐.
화자는 알고 있다. 사랑이라는 요구와 자기 보존이라는 요구가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는 걸. 누군가를 사랑하려면 자기 안의 무언가를 꺼내 써야 하는데, 그 저장고가 비어 있을 때 사랑은 의무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제니의 집엔 꽃이 가득하다. 금잔화, 장미, 들꽃. 인형의 집 안엔 없는 게 없다. 그리고 장난감 시계, 타자기, 고기 요리, 냄비들.
가득 차 있는데, 아무것도 삼키지 못하는 사람.
어른이 된 제니는 엎드린 채 더러운 시트에 얼굴을 묻는다. 연인의 심장이 쿵쿵거리는 걸 팔 위에서 느낀다. 생명에서 빠져나온 무언가인 듯. 거대한 기계, 쓸쓸한 엔진이 그녀를 대신해 그녀를 움직인다. 그 기계가 그녀를 문밖으로, 거리로 내보낸다.
나도 요즘 그런 기계가 나를 출근시키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게 위안이 됐다. 이상하게도.
어른이 된 제니가 있다. 목을 감싸는 연인이 있는 여름. 수백만 송이 꽃이 무덤을 뒤덮는 풍경. 제니의 입이 아프고 배가 아프다. 연인은 그녀의 유치함이 싫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의 무표정하고 따뜻한 얼굴을 제니가 바라봐주길 원한다. 그는 술에 취해 욕실에서 피를 토하고, 면도 거품을 바른 얼굴은 가면이 된다.
무서운 건 다섯 살 제니 안에 이미 이 모든 게 들어 있다.
레스토랑에서 제니는 촛불을 끈다. 웨이트리스가 다시 켠다. 제니가 또 끈다. 이게 반복된다. 윌리엄스는 이 장면에서 끝내지 않는다. 촛불을 끄는 것만이 제니가 할 수 있는 전부고, 그것조차 계속 다시 켜진다. 루프. 지옥. 반복.
30대에 읽기 좋은 단편선이다. 내가 선택한 것들이 사실 아주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었던 것 같은 느낌. 지금 여기 있는데 동시에 이미 다른 시간 안에 있는 느낌. 원인과 결과가 말을 안 듣기 시작하는 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