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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된 삶 ㅣ 워프 시리즈 3
앤 차녹 지음, 김창규 옮김 / 허블 / 2022년 10월
평점 :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마다 이 책을 읽었다.
모든 것이 지긋지긋해지면, 아름다운 것이나 경이로운 것을 봐도 아무 느낌이 없고
맛있는 음식이 눈앞에 있어도 먹고 싶지 않고
음악을 듣는 것조차 힘들어져서...
모든 것이 버겁고 지겹게 느껴지곤 한다.
그런 건조한 나날에 <계산된 삶>을 만난 건 나에게 얼마 허락되지 않은 행운 중 최고의 일이었다.
일단 너무 대놓고 화려하지 않은, 은은한 후가공의 세련된 표지가 마음에 들었다.
빛이 굴절된 불투명 유리 너머로 보이는 상처럼 분절된 여성의 모습이
소설 내용에 대한 풍부한 이해에서 나온 디자인 같아서 책 전체가 작품처럼 느껴진다.

설현이 주인공인 드라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가 사무직 노동에서 파생된 감정들을 리얼하게 보여주고 있다면
이 소설은 회사원이 조직생활을 하다 보면 피할 수 없는 고충들을 패러디해 SF로 풀었다.
설현처럼 제이나도, 회사에서 탈출하기 위해 치밀한 전략과 계획을 세운다.
<계산된 삶>의 제이나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의 설현이 회사를 나가고자 하는 이유는 사실상 같은 성격의 것이다.
자기 자신이 산산조각나기 전에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메이 휴 맥클라인사는 제이나에게서 기억을 빼앗아 가려 한다.
기억은 추상적인 것이라 재산이라는 감이 잘 오지 않지만 인격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성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에게서 기억을 빼앗아갈 권리는 신에게도 없을 것이다.
복제인간인 제이나는 인간 동료처럼 고양이를 기를 수 없어 대신 벌레를 기르는데, 그 벌레가 죽는다.
그녀가 벌레의 사체를 위해 종이 수의를 만들고, 그것을 블라우스 주머니에 넣는 장면이 가장 인상깊었다.
제이나가 종이 수의에 적었던 메멘토 모리라는 말이 계속 맴돈다.
그녀처럼 지킬 수 없는 것을 지키기 위해... 사소하지만 이상하고, 그래서 오히려 더 결정적인 분기점이 될 그런 미션들을 만들어서 수행해 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