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오디세이
다카시마 도시오 지음, 이유성 옮김 / 심산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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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흠 - 그렇지만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화흠이라고 하면 천박하고 비열한, 그야말로 가장 수준 낮은 인간으로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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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원인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복황후(헌제의 황후)의 사망과 과련이 있고, 또 하나는 조비의 제위 찬탈과 관련이 있다.-57쪽

화흠 - 근엄 청렴결백의 화신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위나라 총리대신을 많와에 나오는 악당처럼 꾸며낸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61쪽

진궁 - 어쨌거나 중국 역사상 천하를 차지할 정도가 되는 인물들은 한 고조에서 모택동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영아부인, 무인부아'의 마음가짐으로 살아왔다. 아니, 명심하지 않더라도 천성적으로 그런 정신을 지닌 인물들이었던 것이다. 그러지 않고는 천하를 다스리는 일 따위는 애초부터 단념하는 편이 안전하지 않았을까.-65쪽

화타- 화타는 스스로 학문을 하는 '선비'를 자처했것만, 본의 아니게 의술이 출중해서 한 사람의 기술자로밖에 대우받지 못했다. 조조라면 자신을 선비로 대해줄까 기대했지만, 역시 의사로만 대하면서 기껏 두통이 생길 때나 부를 따름이었다. 그것이 불만이어서 화타는 떠났던 것이다.-71쪽

유표 -소설 '삼국지연의'에 유표는 진취적 기상이 부족한 대장으로 그려져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오히려 삼국시대의 가장 훌륭한 대장이라 할만하다. 과단성을 요할 때는 무척 단호했음이 종적 주살에서 나타난다. 자기 역량으로는 전국의 전란을 진압하기가 어려울 것으로 보고, 오히려 치정을 맡은 형주의 평화를 보전하려 한 것은 현명한 판단이었다고 할 것이다.-111쪽

채모 - 삼국시대에 관한 한, 중국인의 관념은 그야말로 연극이나 소설에 의해 완성되어 있다. 어른이 되고 나서 역사책을 아무리 읽어도 인물이나 사건에 관한 관념은 어릴 때 접한 연극이나 소설에서 받은 그 강렬한 인상을 벗어나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117쪽

마등 - '관우'는 '관서' '관중'과 같은 뜻이다. 이 경우에도 관은 물론 함곡관/동관을 말한다. -146쪽

적벽대전 - 적벽대전이 삼국시대의 가장 중요한 전튜였음은 누구나 알고있다. 그러나 사실 이 싸움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한다. 아니 좀 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거의 아무것도 모른다. 언제 어디서 일어났고, 누가(누구 누구가 지휘하는 어느 정도의 병력이) 참전했으며, 어떤 경과를 거쳤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168쪽

관우의 전적으로서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은 2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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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는 건안 5년(200), 관도 대전 초기의 백마 전투에서 원소 쪽의 대장 안량을 죽인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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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는 건안 24년(219), 관우의 마지막 전투다.-203쪽

조조 - 호칭에 관하여 - 조조는 조, 유비의 비, 제갈량의 량이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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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은 중대한 것으로서 소중히 간직해야 하기 때문에 보통은 사용하지 않는다. 흔히 사용하는 것은 자다. 조조의 자는 맹덕, 유비의 자는 현덕, 제갈량의 자는 공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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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과 자를 붙여서 쓰는 일은 없다. 따라서 '유비현덕'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무지무학한 사람이라고 단정해도 좋다.
성과 자를 붙이는 것은 극히 보통이다. 조맹뎍, 유현덕, 제갈공명과 같은 호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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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혹은 친한 사이에서는 서로를 자로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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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관직에 나가면 관직으로 부른다. 제후가 되면 봉호로 부른다. 그리고 죽어서 시호가 주어지면 시호로 부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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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는 승상으로 불리고, 위공으로 불리다가, 위왕(실제로는 단순하게 '왕'으로 불리기에 이르러서 죽었다.
사후에는 묘호가 태조, 시호가 무황제이기 때문에, '태조'라고 불러도 되고 '무제'라고 불러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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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무제'혹은 줄여서 '위무'라고 부른다. 이 위무제 혹은 위무가 후세 사람이 조조를 부를 때 가장 상식적인 호칭이다.-253쪽

조조 - 건안문학 - (첫째) 지식인의 것으로 만들었다는 뜻이다. 서민의 가요이던 것을 지식인의 사상이나 감정을 담는 수단으로 만들었다.

둘째, 개인의 것으로 만들었다. ... 개인의 독자적인 관찰이나 상념을 노래하는 것으로 바꿔놓은 것이다. ... 작자 개인의 이름이 붙는 문학 작품이 되었다.

셋째로, 멜로디를 떠나 가사가 독립했다. 즉, 순수 언어예술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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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시'라고불리는 것의 역사는 아주 오래되었지만, 후세 사람이 시라고 부르는 장르, 즉 오늘날 우리가 시라고 발 때 떠올리는 것은 의외로 역사가 짧아서 조조 그룹에서 시작되었던 것이다.-264쪽

조조 - 제왕으로서 조조의 가장 뛰어난 면은 사람을 부리는 데 노련했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조조는 역대 제왕 중에서도 발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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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사여탈의 권한을 쥐고 있더라도 자제해야 한다. 제왕을 속박할 자는 아무도 없으므로 스스로 억눌러야 한다. 그것이 가장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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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까지 수백 년 동안의 인물 등용 기준은 인격이고 도덕이었다. 도덕의 근본으 효이기 때문에, 불효자를 중용하는 일 따위는 애당초 논외였다. 하긴 도덕에 의해 사람을 뽑는다고 해도 대개는 표면상의 방침이고 실제로는 가문이 중요하다. 이러한 방침과 실제와의 괴레에 이미 허위가 있는 것이다.

건안 14년(209)의 구현령에서 이렇게 말했다. "제군들, 나를 도와서 숨은 인재를 찾아달라. 오직 재능 있는 자를. 나는 얻어서 이를 쓸 테니"
또한 건안 19년의 구현령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품행이 바른 선비가 진취적이라고는 단정할 수 없다. ..."
또한 건안 22년의 구현령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 조조로서는 지난 예를 들면서 "비천해도 좋다, 불효자라도좋다" 며 거듭 강조해야만 했던 것이리라.-268쪽

제갈량 - 유비가 살아 있을 동안, 제갈량은 줄곧 내정을 떠맡고 있었다. 그리고 행정의 최고책임자로서는 보기 드물게 혹리형, 법가형으로서, 말하자면 정의파 관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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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은 승상 즉 총리 대신의 지위에 있으면서 정의파의 명성을 떨쳤으므로 보기 드문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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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제갈량은 사람들이 친근감 있게 잘 따르고 안심할 수 있는 그런 스타일의 정치가는 아니었다. 어딘지 무섭고 가까이하기 어려우며 아무도 시비를 걸려고 하지 않는 스타일의 정치가였던 것이다.
-327쪽

제갈량 - 게갈량 등의 촉한 정권은 타관 출신 정권이었으므로 자기네 지역에서 특별히 물자를 짜낼 수 없어 남쪽의 소국에서 수탈했던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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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가 죽은 지 4년 만인데, 이 4년이 북정의 준비기간이었던 셈이다.-331쪽

제갈량 - 이는 이상의 표명, 즉 표면산의 방침을 언급한 것일 뿐, 현실적으로는 도저히 무리였다. 중원은커녕 동관의 동쪽으로 나가는 것조차 무리였다. 그렇다면 제갈량은 과연 어떤 현실적 성과를 이루고자 군사를 거느리고 북쪽으로 향한 것일까 ?

하나는 국가의 존재 이유를 실체화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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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는 북방 변경의 불안 해소다. -336쪽

제갈량 - 제갈량의 팔진도 - 중국이 전통적으로 극단적인 문존무비의 나라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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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포나 손책은 중국에서는 무척 이질적인 장군으로서 선두에 서서 창극을 휘두르며 적진으로 돌입해 들어가는 타입이지만, 보통의 문관 장군은 조조나 원소처럼 뒤쪽에서 지휘를 한다. 그런 경우에는 전체를 조직적으로 움직일 궁리를 한다. 지금 여기의 당면 현실과는 무관한 옛서책을 읽고 지성을 닦은 사람이라서 아무래도 이론이나 관념이 앞선다. 그래도 조조처럼 전투 현장에서 부단히 위함한 순간을 겪다 보면 사고방식이나 행동양식이 실전형으로 바뀌겠지만, 그렇ㅈ 않은 경우에는 탁상공론이나 독선, 혹은 유희적으로 되고 만다. 신비철학적 색채가 두드러진 진법이론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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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보면 여덟 가지로 변화했다는 팔진도도 필시 정묘하기는 했겠지만, 과연 실전에 적용할 만한 것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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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해마다 무리를 움직이고도 아직 능히 공을 이루지 못했다. 어쩌면 웅변의 장략이야말로 그의 장점이 아니었을까"-3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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