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면일기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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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도 쉬우면서 내용은 알차리라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생각을 배반하는 작품도 종종 있지만, <외면일기>의 경우 그에 딱 들어맞는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프랑스 작가 중에서도 노트의 대가인(<사랑의 단상>, <작은 사건들>) 롤랑 바르트가 자꾸 생각났다.
투르니에에게는 바르트의 '번쩍이는' 섬세함과 예리함은 없지만
-<작은 사건들>을 읽다 보면 지극히 통속적인 이 세계와 바르트의 날카로운 지성이 어느 정도 사이를 두고 충돌하는 순간이(바르트가 말한 '틈새')있다. 그것은 시적이고 슬프기까지 하다.-
읽기 쉽고 간결하며 무엇보다도 친근하다. 심지어 필요한 곳에서는 적당히 속되기도 하다. 그런데 그 속됨은 독자가 미소짓게 하는 그 무엇이며, 엘리티즘이나 데카당스와는 거리가 멀다.
또한 자신의 전문분야(글쓰기)에서는 '적당히' 독단적이지만 (철학자와 작가에 대한 호오가 분명히 드러나는 촌평들)
그 외의 인간과 세계는 줄곧 호의와 유머가 어린 눈길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는 중반에 작가 자신의 입을 통해 직접 설명되고 있다.

"매일 큼지막한 공책에다 글을 몇 줄씩 쓰십시오. 각자의 정신상태를 나타내는 내면의 일기가 아니라, 그 반대로 사람들, 동물들, 사물들 같은 외적인 세계 쪽으로 눈을 돌린 일기를 써보세요. 그러면 날이 갈수록 여러분은 글을 더 잘, 더 쉽게 쓸 수 있게 될 뿐만 아니라 특히 아주 풍성한 기록의 수확을 얻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눈과 귀는 매일 매일 알아 깨우친 갖가지 형태의 비정형의 잡동사니 속에서 글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을 골라내어서 거두어들일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독자의 입장에서는, 이 풍성한 에피소드와 유머와 경구와 이야깃거리와 인용문들 사이에서 마음놓고 길을 잃는 즐거움이 있다. 마치 일류 큐레이터가 수집하고 기획한 전시회를 둘러보는 기분이랄까.

TV속의 공허한 언어유희들은 말 그대로 '개그'일뿐 '유머'는 되지 못한다. 그리고 그걸 들으며 깔깔대는 우리의 모습은 현대인의 삶이 얼마나 빈곤해졌는가에 대한 좋은 예시다.
한번만 밟으면 그것은 바스락 부서져버릴 것이다. 알맹이 없이 껍데기만 있는 속빈 열매처럼.

투르니에식 유머의 샘플.

"오늘 밤 라디오를 듣다가 나는 옛 스승 가스통 바슐라르 선생의 부르고뉴 악센트가 섞인 목소리를 즉시 알아차린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그 목소리는 그에게 엉뚱한 질문들을 던지곤 하는 어떤 바보녀석 때문에 자꾸 끊어지곤 한다. 그리고 방송이 끝나면서 이런 안내의 말이 흘러나온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1949년 가스통 바슐라르와 미셸 투르니에가 주고받은 대담을 녹음한 INA 자료내용을 들으셨습니다."

성공했고 잘났고 행복한 사람이 스스로를 (적당히) 놀림거리로 만드는 것만큼 자타를 유쾌하게 만드는 유머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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