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도 끝나지 않는 하늘
마를렌 하우스호퍼 / 문예산책 / 1996년 10월
평점 :
품절


<유리반지>를 처음 읽은 것은 국민학교 5학년 때였다. 나는 그 섬세함, 예리함에 마음이 울리면서도 뭔가 답답함을 느꼈다. 그 작품이 <데미안>과 쌍벽을 이루는 소년/소녀 성장소설이라고들 했다. 하지만 <데미안>은 오히려 <유리반지>보다도 더욱 울림이 적었다.

고등학교 때 이 소설을 읽으면서 그 답답함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메타는 땅에 발을 붙이고 있는 아이다. 그녀에게는 평범한 부모와 가족과 이웃이 있고, 자연이 있고,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형성되어 가는 삶이 있다. 나는 고립된 감수성(혹은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감수성)을 믿지 않는다. 고인 물은 썩게 마련이다. 감수성의 극한이란 건, 병적이라고까지 하기엔 좀 뭐하지만, 확실히 내 취향은 아니다. (help me to get my feet back on the ground!)

어머니의 주부다움에 질식하고, 아버지의 자유를(엄밀히 말하면 가정을 성립하기 전, 과거의 자유이지만) 동경하는 메타는 아마도 작가의 유년을 반영할 것이다. 과거의 많은 여성작가가 그러한 유년을 보여준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창조가 양성성을 필요로 함을 생각할 때, 그녀들은 부여‘된’ 여성의 body와 아버지를 통해 습득‘한’ 남성의 mind(지식, 자유, etc)를 결합시켜야 했다. 딸이 어머니에게서는 지적 자극을 얻을 수 없었던 시대! 보봐르가 여성성을, 여성의 몸을 초월해야 개체가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말했던 것도 놀랍지 않으리라. (지금 세대에서도 그런 양상이 완전히 극복되었다고 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린저나 헤세의 성장소설들이 우리나라의 청소년-학생들에게 인기 있는 것은 당연하다. 사회에서 고립되어 극한에 달한 감수성을 보여주고 있으니까.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그 작품들이 당시 독일의 역사적 억압의 맥락과 분리되어, 심지어는 현재 우리나라가 사회적 차원에서 청소년-학생에게 가하는 억압의 맥락과도 분리되어, 개개인이 느끼는 정서적 억압을 위무하기 위해 읽혀지고 있다는 점은 아쉽지 않을 수 없다.

이 작품 속에서 가부장적 가족에 대한 날카로운 관찰력과 부정적 시각을 끊임없이 느끼면서, 말렌 하우스호퍼가 가정주부가 되지 않았다면 어떠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녀가 주부-작가의 길을 택한 것은 당시 사회에서 일종의 타협이 아니었을까? 더욱 강렬한 후속작인 <벽>(출간된 지 십 년이 넘었다. 꼭 재출간되기를 바란다)이 거의 분리주의 페미니즘의 색채를 띄고 있음을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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