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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민 골짜기의 11월 - 즐거운 무민가족 8, 소년한길 동화 18 ㅣ 즐거운 무민가족 8
토베얀손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한길사 / 2001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무민 시리즈에 대해 얘기하자면 끝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무민 골짜기의 11월>에 대해서만 얘기해보려 한다. 나는 <무민 골짜기의 여름>과 <무민 골짜기의 11월>을 제일 좋아한다. '11월'은 겨울의 나라로 인식되는 핀란드 특유의 그 쓸쓸한 자연(꽤나 건조한 정서를 지닌 나는, 구체적이고도 매력적인 풍경 묘사를 보며 무민들의 세상이 정말로 존재할 것 같다는 환상보다 외딴 섬에서 혼자 살며 작품을 썼다는 작가가 무엇을 느끼고 보았을지 읽어내려고 하는 편이지만)을 오롯이 담아내고 있어 좋고, '여름'은 그만큼 짧고 아쉬운 여름의 꿈같은 느낌(연극 무대가 집이 된다니 비일상성을 드러내는 정말 멋진 설정이 아닌가)이 좋다.
'11월'에서 시리즈의 중심이 되어 왔던 무민 가족들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앞선 '겨울'에서 무민 트롤 혼자만이 등장했으며 그의 역할이 투-티키와 같은 매력적 조연들에 가려져 미미했던 것에서 '11월'과 같은 후속작을 예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책을 좋아하는 데는 원래 무민 가족보다 조연들을 더 좋아하는 개인적 취향의 문제도 있긴 하다.
하지만, 뭐랄까, 무민 가족은 완벽하고 행복한 가정의 원형과 같다. 조연들이 오히려 좋게 말하면 ‘개성적’이고, 정확히 말하면 뭔가 결핍된, 그리고 현실에 가까운 존재인 것이다. 무민 가족은, 그리고 무민 가족들이 있는 세계는 하나의 이상이다. 필리정크, 그럼블 할아버지, 헤물렌, 훔퍼는 현실의 자신에 불만족하여 막연한 기대로 이상의 공간을 찾아온다. 그러나 이상은-무민 가족은-부재한다. 그들이 남기고 간 메시지란 것도 전혀 이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는 시시한 주의사항이다. 무민 가족의 집에서 우연히 만나 함께 지내게 된 이들이 거치는 단계는 다음과 같다.
혼란과 불일치(카오스)->부재를 중심축으로 하여 운행되는 질서->부재라는 중심축이 인식에서 사라지고, 독립적으로 조화롭게 운행되는 질서
훔퍼는 밈블 언니에게서 엄마 무민이 화났을 때 가는 숲에 대해 듣는다(‘엄마 무민은 화 같은 건 내지 않아!’). 필리정크는 엄마 무민을 따라하지 않아도 자신의 방법대로 집안을 멋지게 꾸려나갈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자신 속의 엄마 무민을 발견한다.)훔퍼는 자신이 만들어낸 괴물을 스스로 다루고 돌려보낼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자신 속의 무민트롤-사랑받고 독립적이며 자신을 콘트롤 할 수 있는 아이-을 발견한다.)헤물렌은 그에게 부재의 기호였던 보트를 현실에서 경험함으로써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극복한다.(자신 속의 아빠 무민을 발견한다.)
결국 이들은 현실의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그것은 이상에 대한 체념이라기보다는, 이상이란 현실과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깨달음이다. 이상이란 언제나 존재하는 현실의 불만족에 균형을 맞추기 위한, 그럼으로써 내가 계속 존재해 나가기 위한 방편인 것이다. 현실에 대해 계속 부정적이고 수동적 태도를 취하면, 이상은 점점 자라나 현실을 압도한다. 그래서 현실을 포기하면 이상도 소외되고, 이상을 포기하면 현실도 소외된다. <무민 골짜기의 11월>은 이러한 진리를 너무도 매력적인 이미지와 묘사들로 그려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