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왼손 그리폰 북스 3
어슐러 K. 르 귄 지음, 서정록 옮김 / 시공사 / 2002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오래 전 보았던 책을 다시 보면 새로운 느낌을 받기 마련이다. 그것은 실망일수도 있고 기쁨일수도 있다. 그러나 4년만에 읽는 <어둠의 왼손>에서는 딱히 느껴지는 것이 없었다. 왜일까. 르귄의 세계가 사람들의 말대로 '사고 실험'의 산물, 그 자체로 너무나 완벽하고 완료된 세계이기 때문일까. 한 권의 책을 쓰는 것이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라면 르귄은 그야말로 독보적이지만, 그만큼 닫혀 있다는 느낌을 준다. 내 경험은 그 완벽한 세계에 뭔가를 더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때문에 <어둠의 왼손>이 <빼앗긴 자들>보다 더 매력적일 수 있다. <빼앗긴 자들>의 세계는 독자를 압도하고 전율시키지만 그것이 전부이다. 인물들은 그 설정과 사건들 속에서만 살고 그 밖에서는 생명을 갖지 못한다. 에스트라벤은 '불완전 연소'된 인물이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더 매력적이다. 내가 미처 찾아내지 못한 무언가를 더 갖고 있을 것 같은...그의 연인이자 형이었던 아렉에 대해 독자는 거의 알지 못한다. 그들의 사랑은 게센의 창조 신화를 빌려 은유적으로 모호하게 말해질 뿐이다. 뭔가 애매한 여운을 남기는 결말은 에스트라벤의 사랑 이야기가 아직도 완결되지 않았다는 느낌을 준다. 겐리 아이의 시각과 에스트라벤의 시각, 그리고 감정의 변화하는 색조가 교차하는 시점을 통해 미묘하게 다가오고, 이것은 <빼앗긴 자들>의 전지적 시점에 비해 작가의 '사고 실험'이라는 느낌을 상당히 줄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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