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나귀님 > "주마관산"으로 뒤적이기 (14) : Mr. KNEW 세계문학...

 

열린책들이란 출판사를 보면 한때 "역전의 명수"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어느 고등학교 야구부가 생각난다.(물론 프로야구란 것이 생기기 이전의 이야기다.) 아마 나 말고도 열린책들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는 독자 중 상당수가 그들의 "끈기"를 높이 평가하고 있을 텐데, 아닌 게 아니라 열린책들의 대표작 가운데에는 처음에는 죽을 쑤다가 오랜 시간에 걸쳐 꾸준히 인기를 얻은 것들이 없지 않아서, 가령 <좀머 씨 이야기> 같은 경우에는 초판이 완전히 "망한" 것을 표지갈이를 하고 재판 간행하면서부터 입소문을 통해 꾸준히 팔려나가기 시작, 결국 지금과 마찬가지로 초대형 베스트/스테디셀러가 된 것으로 알고 있다. 열린책들의 또 한 가지 장점은 "작품"보다는 "작가"를 중심으로 기획을 하는 그야말로 요즘엔 보기드문 "뚝심"의 출판사라는 것이다. 사실 이들은 움베르토 에코, 장 자크 상페, 폴 오스터, 베르나르 베르베르, 파트리크 쥐스킨트, 루이스 세풀베다 같은 쟁쟁한 외국 작가를 선뜻 "열린책들의 작가들"로 소개할 정도로 큰 애정과 자부심을 갖고 있는 듯하다. 우리나라에서야 뭐 어떤 작가가 좀 "떴다" 하면 여기저기서 손짓발짓몸짓을 동원해 "모셔가기" 바쁘고, 또한 외국 작가라 하더라도 한 번 "떴다" 하면 후속 작품을 서로 잡으려고 출판사 간에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게 마련이다. 그렇게 따지자면 열린책들이야말로 독일이나 프랑스처럼 특정 작가를 떠올리면 곧바로 특정 출판사가 떠오르는 --- 대표적인 경우가 "헤르만 헤세 = 주어캄프"라고 할 수 있겠다 --- 이른바 "행복한 동거"를 하는 출판사로는 우리나라에서 무척이나 희귀한 경우가 아닐까 싶다.

앞에서 이들의 출판 스타일을  "역전의 명수"라고 했는데, 아닌 게 아니라 열린책들의 장점은 "자기가 낸 책을 결코 완전히 잊지 않는다"는 점에 있지 않나 싶다. 쉽게 말해 일찍이 열린책들에서 나왔다가 절판된 책은, 최소한 10년에서 15년 가량 기다리면 다시 만나볼 수 있다는 거다. 가령 스투르가츠키 형제의 <종말 전 10억 년>만 해도 1988년에 초판이 나왔다가, 11년 뒤인 1999년에 <세상이 끝날 때까지 10억 년>이란 제목으로 표지갈이를 해서 새로 나왔고, 지금은 또 절판되었지만 아마 11년 뒤인 2010년쯤에는 <세상이 끝날 때까지 '여전히' 10억 년>이란 제목으로 재출간되지 않을까 싶다.(물론 출판사 내부사정을 아는 것은 아니므로 장담할 수는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솔직히 열린책들의 책을 "수집"하는 독자들이라면 무척이나 골치가 아프고도 남을 것이, 가령 <장미의 이름> 하나만 쳐도 초판본과 개정 상하본과 하드커버 상하본과 페이퍼백 상하본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에코를 무척 좋아하는 독자라면 이런 판본을 하나하나 수집하는 것을 재미로 느낄 지도 모르지만, 솔직히 나처럼 일찍부터 열린책들에서 나온 책이라면 소설책이건 만화책이건 경제경영서건 자녀교육서건 일단 한 번 사다 놓고 보는 쪽으로선 약간 기분이 언짢기도 하다.(지금이야 "문학 전문 출판사"지만, 그보다 이전의 열린책들은 이른바 "러시아 문학 전문 출판사"였고, 창립 당시만 해도 앨 리스의 <마케팅 전쟁>이니, 뽈 루 쉴리쩨르의 <여성 백만장자들>이니, 심지어 미국의 코미디언 빌 코스비의 유아교육서인 <고독한 아빠, 자랑스런 아버지>를 펴내던 "종합" 출판사였다.

 

그나저나 내 경우에 결정적으로 "심기가 불편"했던 것은 지난 6월 초의 서울도서전에서 열린책들의 이른바 Mr. KNOW 세계문학이라는 시리즈를 보고 나서였는데, 아무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이 이른바 "21세기형 전집물 판매"로 서점계를 강타했다고는 하지만 "역전의 명수"이며 여유만만이 주특기인 열린책들까지도 굳이 이런 "세계문학전집"이라는 허상을 쌓는 데 뛰어들어야 하느냐는 아쉬움 때문이었다. 까놓고 말하면 "장삿속"이 좀 노골적으로 들여다보여서 불편했다는 거다. 물론 장사를 해야 먹고 사니, 장사 좀 잘 해보겠다는 출판사를 나무랄 것이야 없다. 다만 가뜩이나 괴테 전집, 헤세 전집, 셰익스피어 전집을 헤쳐모여 시켜 졸속으로 만들어 놓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을 보는 것도 괴로운 판에, 이젠 그나마 "자존심 있는" 출판사로 여겼던 열린책들까지 그 대열에 동참하니 더더욱 한숨이 나왔다고나 할까. 결정적인 문제는 그나마 세계문학의 고전을 중심으로 그럭저럭 "구색맞추기"에 성공했던 민음사의 경우와 달리, 열린책들의 경우는 솔직히 작가별 선집이라면 몰라도 이런저런 다양한 "백리스트 재활용품"을 굳이 "시리즈"로 묶어놓으려다보니 아무래도 무리수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막심 고리키와 E. M. 포스터, 그리고 존 스타인벡과 파스테르나크까지는 그럭저럭 "고전"에 드는 작가라고 쳐도, 제임스 미치너나 베르나르 베르베르나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의 책까지 같은 범주에 집어넣는 건 고개가 좀 갸웃거려지는 일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절판된 책을 일정 기간 뒤에 "되살리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가령 오랫동안 절판되었다가 이번에 다시 살아난 <우주 만화(코스미코미케)>나 <의심스러운 싸움>이 그렇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한창 판매되던 책을 판형만 바꾸어서 "재활용" 하는 것은 좀 문제가 있다고 본다. 민음사의 경우에도 한때 "종수 채우기"를 위해 기존의 백리스트에서 이것저것을 가져다가 판만 키워놓았는데, 솔직히 양식이 있는 출판사가 해야 할 행동은 아니라고 본다. 물론 Mr. KNOW 세계문학이 일종의 "페이퍼백 실험"이라는 것에는 동의하고, 그런 면에서는 바람직한 면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10년, 혹은 15년 걸려서 이런저런 기회에 한 권 두 권 읽고 또 사모은 책들이 판형과 표지만 갈아서(대부분은 표지도 그대로이지만) 몽창 "전집"으로 둔갑해 나오다니, 솔직히 좀 허무한 느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아닌 게 아니라, 책장을 뒤져보니 이 시리즈 30권 가운데 약 20여 권이 이미 우리 집에 "있는" 책이었으니까. 이건 요즘 하여간 무슨 "신판"이며 "개정판"들이 물밀듯 쏟아져 나올 때마다 드는 생각인데, 과연 기존에 갖고 있던 "구판"을 버리고 냉큼 "신판"을 사야 하는지 고민이 좀 된다. 아무래도 "헌 것"과 "새 것" 사이에서는 갈등을 하게 마련이니까. 그래도 선뜻 "구판"을 내치지 못하는 것은 아무래도 오랜 세월 뒤적인 까닭에 손때도 타고, 그 한 권 한 권을 어렵사리 구했을 때의 흥분과 추억이랄까, 그런 것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런 망설임이 있기 때문에, 우리 집에는 한동안 Mr. KNOW 세계문학은 발붙일 일이 없을 것 같다. 다만 그 과거형인 Mr. KNEW 세계문학이 있을 뿐.



사진설명 : 우리 집에 있는 Mr. KNEW 세계문학. 왼쪽에서부터 차례대로 :

  • 2. 전망 좋은 방 (E. M. 포스터 지음, 한영탁 옮김, 동문사, 1989 초판)
  • 3. 우리들 (예브게니 자마찐 지음, 석영중 옮김, 소련동구현대문학전집 5, 중앙일보사, 1990 초판)
  • 4. 의심스러운 싸움 (존 스타인벡, 윤회기 옮김, 열린책들, 1990 초판)
  • 5. 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이윤기 옮김, 고려원, 1991 22판)
  • 6-7. 닥터 지바고 (보리스 빠스쩨르나끄 지음, 박형규 옮김, 열린책들, 1990 초판)
  • 8.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존 르 카레, 임영 옮김, 동서추리문고 100, 동서문화사, 1979 초판)
  • 9. 기적의 시대 (보리슬라프 페키치 지음, 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1993 초판)
  • 10. 코스미케미케 (이탈로 칼비노 지음, 김운찬 옮김, 열린책들,1994 초판)
  • 11. 프랑스 중위의 여자 (존 파울즈 지음, 김석희 옮김, 프레스21, 1997 초판)
  • 14. 백년보다 긴 하루 (친기즈 아이뜨마또프 지음, 황보석 옮김, 열린책들, 1990 초판)
  • 15-16. 장미의 이름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1994 4쇄)
  • 17. 뉴욕 3부작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웅진출판, 1996 2쇄)
  • 18. 검의 대가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 지음, 김수진 옮김, 열린책들, 2004 2쇄 하드커버)
  • 19. 최후의 세계 (크리스토프 란스마이어 지음, 장희권 옮김, 열린책들, 1999 초판 하드커버)
  • 20. 향수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강명순 옮김, 열린책들, 1992 2쇄)
  • 21. 플로베르의 앵무새 (줄리언 반스 지음, 신재실 옮김, 동연, 1995 초판)
  • 22. 여자를 안다는 것 (아모스 오즈 지음, 최창모 옮김, 열린책들, 2001 초판 하드커버)
  • 23. 연애소설 읽는 노인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열린책들, 2001 초판 하드커버)
  • 24. 소설 (제임스 미치너 지음, 윤회기 옮김, 열린책들, 1992 초판)
  • 28. 최후의 인간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열린책들, 1995 3쇄)
  • 29. 소립자 (미셀 우엘벡 지음, 이세욱 옮김, 2003 초판 하드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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