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즈랑 소금이랑 콩이랑
에쿠니 가오리.가쿠타 미츠요.이노우에 아레노.모리 에토 지음, 임희선 옮김 / 시드페이퍼 / 2011년 9월
평점 :
품절




이유가 수없이 많다는 말은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말하고 똑같지 않을까, 하고... -66p


나는 화를 내고 있었다. 엘비라 때문에 병실에서 쫓겨나 버린 꼴이 된 데에 분개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일찌감치 병실에서 나올 수 있어서 마음 한구석으로는 시원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사실에 화가 나고, 마음이 아팠다. -75p

갖고 싶어서, 너무도 갖고 싶어서 속이 타들어 갈 지경이었던 대상을 드디어 손에 넣게 된 희열과 공포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한마디 변명조차 생각해 내지 못한 채 우리는 관계를 맺었다. -89p


"창 밖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지? 그렇게 넋을 잃고 볼 만큼 좋은 경치는 술이랑 같이 몸 안에 잘 넣어 둬야 하는 거야."

친구들은 마누엘을 두고 알콜중독 일보 직전에 있는 애주가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마누엘이 정말 좋아하는 것은 술이 아니라 술자리다. 그자리에는 대화가 있고 침묵이 있고 인간관계가 생겨난다.(혹은 무너진다) 시간이 독특한 방법으로 흘러서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사람들과 기억들이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자리를 좋아하기에 바텐더라는 직업을 선택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179p


나는 같은 사물을 같이'본다'라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서로 다른 사고가 서로 다른 육체에 갇혀있는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어느 특정한 때에 특정한 장소에서 같은 사물을 같이 '본다'는 자체가 큰 의미를 가진다고 믿는다. -184p


내 생각에는 같은 음식을 같이 먹는다는 것은 의미 있는 행위다. 아무리 섹스하는 사이라도 별개의 인격이라는 사실을 바꾸지 못하는 두 사람이, 매일같이 똑같은 음식을 똑같이 몸속으로 집어넣는다는 행위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206p





'가쿠타 미츠요'의 '신의 정원'  , '이노우에 아레노'의 '이유' , '모리 에토'의 '블레누아' , '에쿠니 가오리'의 '알렌테주' 등 총 4개의 각 60~70페이지 분량 짧은 단편들이 묶여 있는 책인데... 그 중에서 단연 재미로 따진다면 이노우에 아레노의 '이유'를 꼽고 싶다.. 

여러 가지로 재미있는 기억들이 같이 톱니처럼 맞물려서였을까.. 내 안에서도 특정한 시공간과 인물이 막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들이 가슴속으로 그리고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부딪히고 솟아오르던....


특히 '출동'이라는 표현에서는 그 언급의 적절성이 너무나 딱 맞아 떨어져서 자연스럽게 미소 지을 수 있었다.. 출동~

또,  '그녀가 팔을 휘두르고 허리를 돌리면 순식간에 그 주변에 공간이 생긴다. 그 공간에 쏙 들어가서 나도 춤을 췄다.' '나는 다비데와 마주 보면서 아까보다 훨씬 얌전하게 춤을 췄다.', '우리는 비앙카와 파비오처럼 서로의 몸을 만지려 하지 않고, 손이 묶인 사람들처럼 비틀거리면서 어색하게 다가섰다.'..... 이 부분에서는 분명 작가의 상상력만 가지고는 쓸 수 있는 내용이 아닌데 싶은 생각이 들었다.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그런 비유나 이름들을 저렇게 능숙하게 펼칠 수 없다.. 

고유의 감수성이나 유머도 다양한 인생을 경험해보고 즐겨본 자들만의 것은 분명 예상치 못한 부분에 쿡! 악센트를 찍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 사람만의 인생의 결과 지난 시간들을 살짝 목격하는 기분... 정말 사랑스러운 감각이고 기분좋은 미학이다... 


소설을 읽을 때 내가 좋아하는 것은 작가들을 통해 스쳐가던 이미지들이나 나의 혹은 작가가 말하는 경험의 흐름을 포착할 때이고 또 그게 가장 행복하다.

두 종료의 각기 다른 부분이 무언가를 같이 발생시키고 있다는 느낌을 얻을 때... 나와 일치되는 경험이나 비슷한 사례가 작품 속에서 펼쳐질 땐 즐거울 정도로 흠씬 난타당하는 느낌.. (조금은 변태적인 표현일지 몰라도 그렇다..) 그렇게 그 부분에서 경험하지 못했다면 영원히 미지로 남았을지도 모를 또 하나의 잠재적이었던 실재성들... 그것들을 볼 수 있을 때의 즐거움이란 어떤 유행어나 형용, 수사를 총 동원해서 표현해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독특하고 새롭다...



2년전인지 3~4년전인지 '채굴장으로'에서의 감지되던 이노우에 아레노와는 또 다른 모습에.. 무척이나 즐거웠었다.

분명 단편에 엄청 강한 작가들이 또 따로 있는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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