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우울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염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05년 10월
품절


죽음을 상징하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은 부패 그 자체이며, 살은 여전히 생의 상징이다. 왜냐하면 부패에 대한 공포가 싹트기 위해서는 일정한 생의 지속이 인정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살이 그저 임시 거처에 지나지 않는, 사후에 완전히 없어져야 할 장소라면 썩든 태워지든 고통스럽지 않을 것이다. 고통은 무엇보다 자기에 종속되며 자기는 이미 영적 존재로서 살과의 관계를 끊은 다른 차원의 생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생은 여전히 살이라는 공간 안에서 계속되고 있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살의 부패는 죽음에 의해 침식되는 생이며, 생이 죽음으로 이행하는 도중의 과도기적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때 뼈는 죽음에 침식되지 않는 것으로서 그야말로 생의 상징인 것이다. 그런데 부패가 완전히 끝나고 뼈만 남았을 때 그것은 살, 즉의 생의 상실이라는 의미에서 죽음의 상징이 된다. 즉 결어로서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 '골육론(骨肉論)' 중에서-38~39쪽쪽

그런 한편 비밀스런 연락이 너무나도 쉽게 가능하게 되어 그 위험을 어떻게 회피하는가 하는 기술은 완전히 쇠퇴해버렸다. 부모나 남편 또는 친구들에게 알리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 모든 연애극의 주인공들이 그런 것들에 얼마나 많은 머리를 짜내야 했던가. 로미오와 줄리엣도 휴대전화만 있었더라면 어렵게 발코니에서 남의 눈을 피해 애절한 속삭임을 주고받을 필요가 없었을 텐데. 마지막 장면에서도 휴대전화를 사용해 면밀하게 계획을 짰더라면 그런 비극을 맞이하진 않았을 텐데. 시험 삼아 고전 작품의 걸작이라 불리는 연애소설 속에 휴대전화를 한번 집어넣어보자. 거의 모든 작품이 괴멸되지 않을까? 이것은 현대 연애소설의 난점과 깊이 연관되는 문제이다.
- '휴대전화의 연애학' 중에서-118쪽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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