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이론의 모든 것 - 신비평부터 퀴어비평까지
로이스 타이슨 지음, 윤동구 옮김 / 앨피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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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계열 학부생의 필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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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론 입문 - 해석학에서 문화과학으로 문명공동연구 5
아힘 가이젠한스뤼케 지음, 박배형 외 옮김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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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께 군대에서 이 책 읽었다고 말씀드렸더니 두 눈 휘둥그레해지면서 ˝그걸 읽었어? 그 책은 입문이 아니야~˝라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심. 제목에 속지 말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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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러웨이, 공-산의 사유 트랜스필 총서 3
최유미 지음 / 비(도서출판b)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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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 게임>(2021)에서 기훈은 다른 사람들의 죽음을 밟고 올라서면서도 상우가 그 죽음을 당연시할 때 분노하고, 죽은 사람에 대한 자신들의 책임을 구태여 상기시킨다. 하지만 그는 나와 상대 중 한 명은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걸 아는 게임에서 일남을 속이다가 정작 그 사실을 들키자 죄책감에 눈물 짓기도 한다. 기훈의 이런 행동들은 일견 위선적으로 보인다. 이 게임에서 죽고 죽이는 것은 절대 규칙이다. 모두 살리기를 이룰 방법은 없다. 단지 죽음을 매개로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을지를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상우에게 경쟁자들의 죽음은 승리의 도구일 뿐이지만 기훈에게 그것은 우정을 확인하는 방식이고 내 삶의 무게를 더하는 책임이다.


이런 점에서 <오징어 게임>은 자본주의 사회뿐 아니라 부분적으로 생태계에 대한 은유로 읽힌다. 길고양이가 살면 그만큼의 야생 새들이 사냥당해 죽는다. 레비나스 윤리학의 "죽이지 말라"라는 제1계율은 실천될 수 없다. 무엇도 죽이지 않고 사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해러웨이는 그래서 레비나스를 비판한다. "죽이지 말라"라는 계율은 죽여도 되는 생명과 죽이지 말아야 하는 생명의 암묵적 구별을 은폐하고, "죽여도 되는" 범주에 속한 생명에게 이것은 무지막지한 일이다. 우리에게 필요하고도 가능한 실천은 "죽여도 되는 걸로 만들지 말라"라는 계율이다. 죽음이 죄임을 깊이 인정하고, 죽임의 책임에 대해 사유하는 것이다.


<오징어 게임>의 기훈은 죽음과 죽임의 관계망 속에서 "죽여도 되는 걸로 만들지 말라"라는 계율을 반성적으로 실천한다. 그런 점에서 기훈의 승리는 순전한 권선징악만이 아니라 관계성의 윤리의 승리이다. 해러웨이는 이 윤리가 비인간에게까지 작동될 것을 요청한다. '나'는 오롯이 나가 아니고 수많은 장내 미생물이며 이들은 박테리아의 공생으로부터 왔다. 그러나 그 공생은 아름답지 않았고 한쪽이 다른 쪽을 소화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서로가 서로의 삶을 아슬아슬하게 위협하면서 이루어지고 유지되었다. 나는 내가 먹는 닭에게 의존하고 닭은 모이를 주는 사람에게 의존하지만 그 관계는 평등한 것이 아니다. 상호 의존한다는 것은 안정화된 자리에서 손을 꼭 맞잡는 게 아니라 불균등한 권력관계 속에서 주체와 대상의 자리를 오가며 상대가 준 실뜨기의 패턴을 받고 내가 만든 패턴을 되돌려 주는 일을 반복하는 것이다. 우리는 많은 타자와 이런 실뜨기를 한다. 하지만 무엇과 연결되고 무엇과 단절될지 필연적으로 선택해야만 한다. 모든 곳에서 모든 것에 응답할 수는 없으니까. 그 지점에서 윤리가 발생한다.


나는 주위의 타자들과의 관계를 인식하고 그들에게 적절히 응답하고 있는가? 타자의 고통을 나눌 준비가 얼마나 되어 있는가? 나의 지식이 어디에서 왜 무엇을 봄으로써 얻어진 지식인지, 내 앎의 객관성이 담보하는 부분성과 국지성이 어느 정도인지 충분히 성찰하고 있는가? 『해러웨이, 공-산의 사유』는 우리의 모든 지식과 관계가 국지적이라는 새삼스러운 진실을 상기시키지만 소개되는 사유의 구체성과 깊이는 결코 작지 않다. 페미니즘 생태학과 과학기술학의 접합을 통해 새로운 생각의 지평으로 독자를 이끄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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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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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린 읽기'에서 출발해 보자. 『82년생 김지영』이 전유될 수 있는 한 가지 방식은 이 소설의 사회학적 타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임금 격차의 원인이 정말 성차별적 구조인가?" 이에 대해 '맞는 독자'는 아마 이렇게 응답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실제로 이러한 응답을 보아 왔다.) "중요한 것은 정량적 지표, 합리적(이라고 주장되는) 언어로 포착되지 않는 여성들의 차별 경험과 인식이다. 이것은 소설이며, 이 소설의 궁극적 목적은 사회학적 가설의 검증이 아니라, 공통의 감각을 경유한 여성들의 연대와 그것을 통한 정치적 의제화에 있다." 그런데 이것이 소설이기 때문에 행해지는 비판에 대해서는 반대로 사회학적/인류학적 방어가 가능해진다. "길거리에서 '맘충' 소리를 듣는 것이 뜬금없고, 작위적이고, 개연적이지 않다." "현실이 곧 개연성이다. 소설의 내적 논리로는 납득되지 않을지 모르지만 이게 현실이고, 그러한 현실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겐 절절히 공감되는 대목이다." 상술한 비판들은 『82년생 김지영』의 문제제기의 핵심을 다소 비껴 간 '트집 잡기'로 보일 수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답변들도 어느 정도는 편의적으로 들린다. 이것은 사회학이나 인류학 서적이 아니라 소설이라는 답변과, 이것은 그냥 소설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답변이 때에 따라 선택적으로 동원되는 현상은, 문학을 특정한 방식으로 전유한 결과인 것은 아닌가? 확실히 『82년생 김지영』의 스타일은 '소설적'이지 않다는 비판들이 줄곧 제기되어 왔다. 물론 그러한 스타일 덕분에 아마 이 소설이 텍스트를 넘어서 공론장으로 기능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특정한 스타일이 특정한 '틀린 읽기'의 생성과 관계 있어 보인다면, 그러한 독해들을 '틀린 읽기'로 치부하는 것 이상의 책임을 져야 한다. 이렇게 볼 때 『82년생 김지영』으로부터 일종의 지적 게으름을 읽을 수도 있지 않을까? "여성주의 담론의 계기를 제공했으니 그걸로 됐다"라고 쉽게 말할 수 있을까? 예컨대 이런 질문이 수행될 수 있을 것이다. 『82년생 김지영』에 '동의'할지 말지를 함부로 논할 '자격' 없는 남성들의 '비생산적인' 독해가 틀린 것이라 간주할 때, 그러한 판단의 준거는 어디에서 오는가? 여성으로서의 삶이라는 '문학적 자원'을 갖고 있는, 또는 비관습적 방식으로 텍스트를 읽는 법을 교육기관에서 훈련받은 독자들이 '뭣모르고' '못 배운' 남성들의 독해를 오답 취급하는 데에는, 지식을 둘러싼 권력 구조와 억압의 재생산에 관한 성찰이 결여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한편으로, 『82년생 김지영』은 여성들에 대하여 비폭력적인가? 소설로써 현실을 그렸다고 주장하지만, 르포가 아닌 소설이기 때문에 구체적인 현실의 여성들 대신 가상의 집합적인 개인을 그림으로써 '덜 현실적으로' 그릴 가능성이 허용되는 것을 안전장치로 삼고 있지는 않은가? 이 또한 『82년생 김지영』의 특징적 스타일에 관련한 문제이다. "따라서 이 소설의 재현 방식은 여성 독자에게 근원적인 수준에서 불만족스러울 수 있다. 여성의 삶을 표준화하여 균질적인 것으로 만들어 제시하는 거대서사의 논리를 따를 때, 개별 여성의 경험이 지닌 고유성은 훼손되거나 소외되기 십상이다. ... 또한 김지영의 삶을 인위적으로 구획하고 해당 시기를 대표할 만한 주요 에피소드를 나열하는 과정에서 여성의 삶을 좀먹는 불안과 분노, 두려움과 공포, 슬픔과 우울 등 연속적 관점에서 세심하고 깊이 있게 탐구돼야 할 감정들은 단순하고 일시적인 것으로 묘사된다." 신샛별의 비평은 페미니즘적 시각에서도 『82년생 김지영』이 비판받을 이유가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는 이어서 이렇게 쓰고 있다. "... 김지영의 개별성은 번번이 지워지는데, 이렇게 지워진 개별성의 자리에 여성 독자는 스스로 김지영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고유한 체험과 그 체험에 응결돼 있는 감정들을 능동적으로 발굴해 기입하고 있다. 다시 말해 『82년생 김지영』이 프레카리아트 여성의 대표서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여성 독자의 더 읽기/더 쓰기를 북돋우는 재현 방식으로 일종의 참여를 유발하기 때문이지, 이 소설이 그 자체로 여성의 삶을 충분히 적확하게 재현하고 있어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로써 그의 작업은 『82년생 김지영』의 '흠결'로 지목되던 스타일을 매개적 가치로 전환한다. 소설이 어떠해야 하는가, 여성이 어떻게 재현되어야 하는가, 그러한 재현이 어떻게 읽히고 다시 쓰여야 하는가에 관한 규범적 주장들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 규범이 절대화될 때 "『82년생 김지영』은 틀린 미학의 소설"이라거나 "이 소설에 대한 뭇 남성들의 반응은 무지와 빻음의 소치"와 같은 결론이 더 신중하고 열린 사유를 거치기 전에 도출된다. 『82년생 김지영』은 이 밖에도 여러 가지 이유로, 예컨대 남성을 근원적으로 여성과 연대 불가능한 존재로 그림으로써 적대에 기반한 연대를 지향하기 때문에 비판받을 수 있다. 물론 이 적대는 개별 남성들을 넘어 사회 구조를 겨냥하고 있지만, 2023년의 독자는 여기에 덧붙이는 다른 읽기를 통해 이 책의 문제제기를 조심스럽게 전유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덧붙임이란, 우리 모두는 (그러니까 여성들끼리도) 자아의 구조 상 서로에 대해 근원적으로 타자이며 진정한 상호 이해에 도달할 수 없다는 인식이다. 남성인 정신과 의사는 주체의 시선으로 객체화한 김지영을 "이해"했다는 바로 그 자부심 때문에 연대의 가능성에서 자기도 모르게 멀어진다. 이런 의미에서 '남성'은 실제 세계의 남자를 지시할 뿐 아니라 세계와 타인에 대한 특정한 사유 및 관계 설정의 방식을 지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만약 그것의 대안을 '여성적' 관계 맺음이라고 임시로 명명할 수 있다면, 이것이 우리 모두의 삶에 필요하다는 지적이야말로 페미니즘적 사유의 중요한 결실 중 하나다. 나는 '틀린 읽기'와 '틀린 쓰기' 같은 게 존재하지 않는다고는 (아직)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문학을 사랑하는 최선의 방식에 가까워지려는 노력은 대개 틀려 보였던 무언가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일로 수렴하는 것 같다. 『82년생 김지영』은 열린 문학장에서의 텍스트와 세계(의 독자들)의 관계 맺음을 여전히 사유케 하는 소설이고, 그런 이유에서도 지속적으로 진지하게 읽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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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리주의 입문
카타르지나 드 라자리-라덱.피터 싱어 지음, 류지한 옮김 / 울력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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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쟁점, 간명한 논증, 직관적인 구성. 입문서에 필요한 자질을 두루 갖추었고, 고전적 공리주의에 결과주의 진영 내부의 반론을 거쳐 다시 원래의 입장으로 되돌아오는 3장이 특히 흥미롭다. 저자들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는 대목이 종종 눈에 띄는 것은 그만큼 이들의 주장이 명료하게 서술되어 있다는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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