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그림과 글이 독특하게 만난다. 그림은 추상 무늬 하나 없이 고도로 추상적이면서 동시에 복잡한 인간관계와 인간의 시간에 관한 통찰이 아니고서는 느낄 수 없는 소박함이 감돈다. 글은 작가의 자전적/반-허구적 이야기를 토대로 죽음의식, 삶과 아름다움, 계급 문제, 젠더 의식 등등 굉장히 무겁다면 무거운 주제를 전혀 그런 내색 하나 없이 나비 날개의 퍼덕거림 같은 글솜씨로 묘파해나간다. 무엇보다 그 기억술의 예민함과 아련함 그리고 현재와의 대화에서 느껴지는 풍부함이 뛰어나다. 익명의 여성의 삶이 이 땅에서 어떻게 펼쳐지는지, 작가 자신의 삶 속에서 사귀고 만나고 무슨 일인가가 일어난 사람들의 운명이 어떠했는지 그리고 그 짧은 약전 형식 속에서 삶의 헛헛함과 함께 그 삶의 가치를 역설적으로 생각해보게 하는 힘의 근원은 무엇인지.. 계속 사유하게 하는 책이다. 거기에는 그림의 그 추상적이면서 소박한 어필이 크게 작용하는 것 같다. 어쩌면 그림은 글에 구속되지 않으면서 다시금 제 갈길을 가고 있다고 할까. 놀라운 책이다.
회귀할 수 없는 구체제의 철학과 작별하고 새로운 삶의 프로토콜을 노크하는 책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