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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끝나가도 우리는 친밀감을 소중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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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와 편견의 세계사
헨드릭 빌렘 반 룬 지음, 김희숙.정보라 옮김 / 생각의길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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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와 편견의 세계사>는 1925년에 처음 출간된 책으로 한국에는 2000년도에 <똘레랑스>라는 제목으로 먼저 번역되어 나왔다. 그로부터 17년 후인 지금, <무지와 편견의 세계사>라는 제목으로 바뀌어 다시 출간된 것이다. 제목이 바뀐 연유에 대해서는는 '역자 후기'에서 설명하고 있다. 2000년도에 번역이 될 당시에는 홍세화의 저서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를 통해 한국사회에 '똘레랑스'라는 화두가 처음 던져진 시기였다. 그 당시에 낯설고 생소한 단어였던 똘레랑스는 원어 그대로 읽히며 한국사회에 많은 화두를 던질 수 있었지만 그로부터 17년이 지난 지금은 '관용'이라는 단어가 '똘레랑스'의 의미로 우리의 일상에 더 친숙하게 정착이 되었다, 그래서 더 이상 '똘레랑스' 혹은 '관용'이라는 제목이 예전만큼의 환기효과가 없다는 판단 때문에 제목이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추측이지만 최근 출판계에서 "ㅁㅁ로 읽는 세계사", "ㅇㅇ로 보는 역사" 같은 류의 제목을 단 역사교양서들이 잘 팔리는 흐름에 맞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는 바뀐 제목이 충분히 독자들의 흥미를 유발시킬 만하면서도 책의 본 내용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좋은 제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걸리는 지점은 이 책은 사실 '세계사'를 다루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 책은 철저히 유럽사만을 서술한다. 비록 이에 대한 해명도 역자 후기에서 짚고 넘어가긴 하지만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럽사만을 서술하는 책의 제목에 "세계사"라는 명칭을 붙였을 때 불러일으키는 오해는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유럽 이외의 세계를 배제해 서술하는 것은 정확히 '세계사'도 아닐 뿐더러 서구 유럽을 우월한 세계의 중심으로 놓고 비유럽 세계의 역사를 중요하지 않고 열등한 것으로 보는 편협한 관점을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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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작가 헨드릭 빌렘 반 룬은 미국의 역사가이자 저널리스트, 작가였다고 한다. 1882년에 태어나 1944년에 생을 마쳤다. 이 책은 제1차 세계대전을 겪은 후인 1925년에 초판이 나왔고,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고 전체주의가 세계에 확산되던 1940년에 다시 책을 냈다고 한다.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하려고 하는 바와 이 책이 쓰인 시기인 1925년과 1940년의 시대적 상황을 함께 생각하면서 읽으면 굉장히 묘한 독서경험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평범한 역사서라고 생각하고 책의 첫 페이지를 넘기면 조금 당황하게 된다. 첫 챕터인 "0장 - 옛날 아주 오랜 옛날에도"는 먼 옛날 인류의 이야기를 마치 신화나 전설을 들려주듯 서술한다. 무지와 편견에 맞서는 관용의 관점에서 기존의 유럽사를 비판적으로 들여다보는 책 전체의 메세지를 함축적으로 전달하는 일종의 우화인 셈이다. 


옛날 옛적 인류는 '무지'라는 골짜기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7.p)

요즘 재미있게 보고 있는 다음 웹툰 <동쪽으로>가 생각나기도 하고 영화 <매드맥스>나 <설국열차>까지도 연상이 되어서 책의 초입부터 완전히 내 흥미를 가져가버렸다.

1장부터 30장까지는 저자의 관용(그리고 불관용)에 대한 독특한 역사적 관점을 바탕으로 고대 그리스부터 시작해 로마제국 그리고 그 이후에 이르는 시기까지 유럽사에서 '불관용'때문에 박해받고 억압받은 사례들과 관용의 실천을 행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탈레스, 소크라테스에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을 관용이라는 관점에서 재평가하기도 하고, 로마 제국의 개방성과 그 한계점을 역시 관용/불관용의 측면에서 바라보기도 한다. 이미 정립된 유럽사를 관용이라는 관점을 통해 다시금 비판적으로 바라봄으로써 저자는 (책이 출간되었던)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의 현실에 맞는 역사의 교훈, 관용의 정신을 설파하려고 한 것 같다. (불)관용의 관점으로 유럽사를 바라봤을 때, 이 책이 겨냥하는 가장 주요한 타켓은 바로 종교이다. 카톨릭부터 종교개혁 이후의 신교까지 종교의 배타성과 (타 종교에 대한) 불관용 원칙을 저자 특유의 냉소적인 유머 섞인 문체로 비꼬면서도 날카롭게 비판한다. 

그러나 세 번째 승객이 몰래 그 배를 타고 있었다. 그는 성스러움과 덕행의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가면 아래 감춰진 얼굴에는 잔혹함과 증오가 엿보였다. 그의 이름은 바로 '종교적 불관용'이었다. (92.p) 

 책을 읽으면서 가장 묘하면서도 재미있었던 부분은 "9장 출판물과의 전쟁"에서 저자가 자신이 지금 책을 집필하고 있는 시기의 구체적 상황을 언급하면서 앞날에 대한 전망을 말하는 문장들이었다.


그러다 전쟁이 일어났다.
구시대의 질서가 완전히 뒤집혔다. 황제나 왕정은 무너졌고, 무책임한 비밀 위원회가 관련 대신들을 몰아냈다. 세계 곳곳에서 통치자의 긴급칙령으로 신이 공식적으로 사라졌고, 삼류 경제학자가 고대의 모든 신과 모든 예언자들의 후계자로 등장했다.
물론 이것이 오래가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문명세계가 다시 회복하려면 수세기는 걸릴 것이고 그때에 나는 세상에 없을 것이다.
현재로서는, 쉽지 않겠지만 그저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해야지 어쩌겠는가.

여기에서 "전쟁"은 제1차 세계대전을 의미한다. 제1차 세계대전의 충격과 여파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지만 저자는 당대의 지식인으로서 "문명세계가 다시 회복"될 것이라 확신하고 있다. 나는 21세기에 이 책을 읽는 독자이기 때문에 이 책이 쓰이고 난 뒤 얼마 안되어 곧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것임을 안다. 1차의 공포에서 벗어나 회복의 희망을 바라보고 문명세계의 굳건함을 믿는 그 시대의 지식인이 보여주는 낙관은 어쩐지 섬뜩하게 느껴졌다.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또다른, 최악의 시한폭탄이 터질 것을 알고 있는 입장에서 1차의 공포를 수습하고 희망을 믿는 자를 바라보니 무섭기도 하면서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책의 마지막 장 에필로그는 1925년에 낙관적인 전망으로 쓰였던 것을 1940년 개정할 때 빼고 다시 그 시대의 상황에 맞춰 쓴 것이라고 한다. 바뀐 에필로그의 제목은 "해피엔딩은 아닌 것 같지만"이다. 관용의 확대와 발전을 낙관하는 방향으로 쓰여졌다는 1925년판의 마지막 장에서 해피엔딩은 아니라는 현실의 나쁜 상황을 인정하는 1940년판으로 바뀌었지만 그럼에도 "-같지만"을 붙임으로써 희망의 가능성을 놓지 않는 방식으로 마무리하는 저자의 관용에 대한 믿음은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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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 책을 읽으면서 이 때는 이랬지만 지금은 과연 이것이 적용이 될까 하는 부분들이 조금씩 있었는데 이는 역시 1925년과 2018년이라는 시대의 간극이 만들어낸 어쩔 수 없는 한계같기도 했고, 읽으면서 들었던 의구심들을 역자 후기에서 정확히 짚어주어서 굉장히 만족스러운 독서가 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공적 불관용과 사적 불관용을 나누고 사적 불관용을 그저 불편함으로 치부해버리는 관점은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이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현대사회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하지만 저자가 지향하는 관용의 정신과 태도는 여전히 또다른, 어쩌면 더 복잡하고 다양하게 발현되는 불관용의 시대에 살고 있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것 같다. 역자 후기에서는 '관용'이라는 단어가 똘레랑스라는 의미를 품고 우리의 일상에 정착되었다고 말했지만 어쩌면 일상어가 된 만큼 오히려 더 '관용'이라는 단어에 담긴 의미가 가벼워지고 퇴색되거나 망각해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작금의 한국사회의 관용을 수치화할 수 있다면 과연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올까 하는 의문도 든다. "무지와 편견의 세계사"라는 제목은 '무지'와 '편견'을 이미 지나간 시대의 것으로 생각하게 만들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저자가 말하는 바는 인류는 여전히 '무지'하고 '편견'투성이라는 것을 자각해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 곳에서부터 시작해 관용의 정신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관용이 일상어가 되어버린 오늘날이야말로 "무지와 편견의 세계사"라는 제목의 뒤에 숨겨진 '관용'이라는 제목을 더욱 강조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동굴에서 살았던 친구들과 동시대인이며 담배와 포드 자동차를 가진 신석기인이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가는 암굴 거주민들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이해해야만, 그리고 그렇게 이해할 때만, 우리는 미래라는 거대한 산맥 너머에 아직도 숨어 있는 그 목표를 향해서 첫 걸음을 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48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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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터 미드나잇 스릴러
로저먼드 럽튼 지음, 윤태이 옮김 / 나무의철학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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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시스터>는 카피라이터, 서평작가, 드라마와 영화의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던 작가 로저먼드 럽튼이 2010년도에 발표한 첫 장편소설이다. 
소설은 실종된 동생의 소식을 듣고 런던으로 돌아온 언니가 겪은 일들을 사건이 끝난 후 동생에게 편지를 보내는 방식으로 쓰여진 스릴러 소설이다. 스릴러 소설인 만큼 사건의 미스터리와 서스펜스 그리고 반전이 매력적으로 다가왔지만 그에 못지 않게 감성적으로, 슬프게 다가오는 소설이었다. 
500쪽에 달하는 꽤 긴 분량의 소설이지만 이틀 동안 꽤 빠르게 읽어내려 갈 만큼 잘 읽히고 재미있었다. 그 스릴러 소설이긴 하지만 언니가 동생에게 느끼는 절절한 감정들이 쓰여 있어 감성적으로도 풍부하게 다가오는 소설이었다. 

(밑으로는 스포일러 주의)



실종된 동생 테스의 언니 베아트리스가 동생의 실종사건이 종결된 뒤의 시점에서 동생에게 쓰는 편지의 내용은 베아트리스 자신이 변호사 라이트 씨를 만나 사건에 대한 증언을 하는 내용과 자신의 회상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생의 실종 소식을 듣고 베아트리스가 런던으로 돌아온 뒤에 곧 동생 테스가 공원 화장실에 죽은 채 발견된다. 정황상 자살로 판단한 경찰은 수사를 종결하지만, 테스와 친밀한 사이였던 베아트리스는 자신의 동생이 절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리 없다고 믿고 스스로 동생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을 파헤쳐 나가기 시작한다. 테스의 주변인물들을 만나고 동생의 숨겨진 사연들을 알게 되면서 베아트리스는 언니로서 동생의 죽음에 대해 비탄과 죄책감을 느낌과 동시에 자신의 성격과 삶에 대한 변화도 느끼며 복잡한 감정을 가진 채 범인을 추적한다. 

"나는 너처럼 붓을 거침없이 휘둘러 순식간에 근사한 그림을 그려내는 재주는 없으니 이 이야기를 아주 작은 점들로 이루어진 정교한 그림으로 그려내려 해. 점들이 하나씩 모여 마지막에 그림 전체를 보았을 때 어떻게,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마침내 이해할 수 있게 되는 한 장의 점묘화가 완성되기를 바라."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은 베아트리스가 테스에게 들려주는, 사건의 전말을 보여주기 위한 '점묘화'가 소설의 결말에 치닫을수록 베아트리스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되어가는 변화에 있다. 이 '점묘화'가 '거울'임이 드러나는 결말부에 거의 모든 서스펜스가 집중되어 있다. 특히 베아트리스가 회고하는 두 개의 축, 라이트 씨에게 하는 증언과 증언이 아닌 회상이 겹쳐지는 지점의 묘사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베아트리스 자신의 몸 상태와 공원이라는 장소, 그 장소에서의 시간의 변화로 인한 색채의 변화 묘사가 하나로 겹쳐질 때 그 어둠이 전달하는 강렬한 서스펜스는 쉽사리 잊지 못할 것 같다. 
무엇보다 이 반전이 단순히 서스펜스와 충격을 선사하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베아트리스가 사건을 추적하며 느끼는 테스에 대한 감정과 그로 인한 자신의 변화가 이 반전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어 마지막 장에서 먹먹한 감동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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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드라마와 영화 시나리오를 쓴 경력이 있어서 그럴까. 이 소설이 영화화 되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드문드문 하면서 소설을 읽었다. 아무래도 반전을 어떻게 시각화해 보여줄 것인지가 관건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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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비츠 평전 - 인공자아 음악의 시작
김상원 지음 / 소울파트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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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비츠 평전>의 저자 김상원은 뮤지션 출신의 소설가이다. 인디밴드 아소토유니온과 원디시티 등의 앨범을 제작했으며, <러브비츠 평전>처럼 이야기와 음악을 접목시킨 음악소설을 2011년부터 써 오고 있다고 한다. 음악에 조예가 깊다거나 디깅을 하며 음악을 듣는 헤비한 리스너는 아니지만 그래도 아소토유니온과 윈디시티의 노래는 몇 곡을 즐겨들었던 기억이 있어서 저자의 이력을 보면서 내심 반가웠다. 

SF소설을 많이 접해보지 못한 나에게 <러브비츠 평전>은 꽤 읽기 버거웠다. 특히나 <러브비츠 평전>은 SF에 음악평론이라는 특이한 형식을 접목해 서사를 진행시켜 나가는 소설이라 더욱 그랬다. 가상과 실제의 여러 레퍼런스를 섞어 인용하며 평론의 형식으로 진행되는 초중반부가 특히 그랬는데 주인공인 '필자'가 러브비츠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을 것이라 추정되는 인물들을 만나면서 펼쳐지는 후반부의 전개부터는 굉장히 흥미진진했고 결말의 반전 또한 신선한 충격을 선사했다.

소설은 러브비츠라는 정체불명의 뮤지션이 자살 후 남긴 한 곡과 유언 때문에 벌어진 현상을 분석하며 러브비츠의 정체를 추적하는 음악평론가인 '필자'의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된다. 음악에 대한 조예가 그리 깊지 않아서... 대부분 이해를 제대로 하지 못한 채로 읽어나갔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레퍼런스들과 소설 속 세계에서 허구로 만들어내는 레퍼런스들을 자유자재로 섞어가며 인용해 가상의 평론을 만들어낼 수 있는 저자의 배경지식과 상상력에 감탄했다. 
악소설이라는 형식에 걸맞게 책의 본문에 QR코드를 삽입하여 소설 속 음악들을 직접 감상할 수 있도록 한 점 또한 굉장히 신선하게 다가왔다. 여러모로 신선하고 독특한 시도가 돋보이는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중간중간 QR코드를 스마트폰으로 찍어 음악을 감상해야 하기 때문에 기존의 단행본 소설을 읽는 긴 호흡을 어느 정도 포기해야 한다는 점은 조금 마음에 걸렸다. 글자를 읽어내려가다가 스마트폰을 들고 QR코드를 카메라로 찍어 음악을 들어야 하는 과정이 생각보다 번거로워서 몰입을 깨는 순간들이 있었고 이런 점은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음악소설이라는 새로운 형식이 기술의 발전으로 어떻게 구현될까에 대한 SF적인 상상의 나래를 나름 펼쳐보는 재미도 있었다. 음악소설을 전자책으로 읽는다면 플레이버튼을 누르는 것만으로, 혹은 정말 기술이 발전해서 독자의 시선을 인식해 특정 문장에 시선이 가닿으면 자동으로 소설의 맥락에 맞는 음악이 흐른다던지 하는 그런 상상들. 소설은 지금까지 항상 글자로 이루어진 매체였지만 앞으로는 꼭 그렇지 않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상상.


다시 소설 얘기를 하자면, 일종의 음악평론 형식으로 진해되었던 초중반부의 전개에서 러브비츠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인물들을 만나게 되면서 진행되는 중후반부의 전개는 개인적으로 매우 흥미진진했다. 특히, SF장르와 뱀파이어라는 소재의 결합이 가장 신선하게 다가왔고, 무엇보다 소설의 화자인 '필자'의 정체가 밝혀지는 반전 부분 또한 흥미로웠다.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의 필자의 말과 생각을 구분짓는 다른 폰트의 활용은 일종의 시각적인 연출로도 보여서 재미있었고, 이러한 폰트를 활용한 연출과 반전의 내용이 내가 읽어 온 소설 <러브비츠 평전>의 정체를 뒤흔드는 느낌을 받았다.

하드SF와 음악평론이라는 형식이 주는 딱딱함과 무거움을 감수한다면 후반부의 서사 전개에서 충분히 그를 보상하고도 남을 만큼의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책의 뒷부분에는 본 소설의 '외전' 격인 두 개의 단편소설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러브비츠 평전> 소설의 세계관을 조금 더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외전도 끝까지 재밌게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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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에서 저자는 이 소설의 작업 과정이 가상의 음악에 대한 평론을 먼저 쓰고 그에 맞춰 음악을 만들고 다시 음악을 감상하며 글에 살을 붙여나갔다고 한다. 기존의 "작품 > 감상 > 비평"이라는 순서를 뒤바꾸어 이를 소설을 만드는 작업으로 전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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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피씨주의자의 종생기 The Story of P.C. K-픽션 19
구병모 지음, 스텔라 김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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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피씨주의자의 종생기>는 꾸준히 판매지수를 올리는 소설을 내며 활동하던 익명의 작가 P씨의 새로운 작품이 SNS상에서 정치적 올바름 (Political Correct)의 관점에서 논란이 되고 비난을 받으면서 그에 대응하는 소설가와 출판사, 그리고 SNS 속 사람들의 반응을 지켜보는 관찰기이다. 

지난 몇년 간 트위터를 익숙하게 이용해 온 나에게 이 소설이 보여주는 광경은 굉장히 익숙하게 느껴졌다. 특히나 내가 트위터를 시작했을 때 트위터 담론의 주류를 형성했던 몇몇 유명한 계정들이 하나둘씩, 이른바 '병크'를 터뜨리고 '피씨하지 못한' 트윗을 썼다는 비난을 받고 '계폭'을 하거나, 성격이 다른 또 다른 SNS(대부분 페이스북)로 옮겨갔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트위터 특유의 리트윗을 통한 '조리돌림' 문화와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 엄격한 잣대를 세우는 경향이 맞물려 내가 알던 유명 계정 여럿이 사라져갔던 것을 기억한다. 

구병모 작가 특유의 냉소적인 만연체로 서술되는, 피씨하지 못한 무언가를 저지른 누군가에 대한 트위터 여론이 보여주는 특유의 대응 프로세스를 읽는 것은 특이한 경험이었다. 굉장히 현실감 있게 다가왔고, 무엇보다 소설 속 화자를 통해 관찰된 SNS 속 살풍경을 보는 것은 나에겐 익숙하게 이용해왔던 트위터를 다시금 성찰적으로 되돌아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피씨함'을 지향하는 이유에 대한 고민이 제거된, '피씨함'만을 위한 기계적인 정치적 올바름의 적용. <어느 피씨주의자의 종생기>는 현실의 단면을 소설로 과감히 끌고 들어와 거울처럼 비춰주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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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 나에게 이 소설은 작가가 현실의 과잉에 맞서 픽션의 영역을 지키고 변호하기 위해 쓴 '쉴드'처럼 읽히기도 했다. "어느 피씨주의자의 종생기"라는 제목이 이미 알려주고 있듯이 이 소설의 이야기는 '종생기'이다. 생이 다함을 맞이하는 주체는 소설가로서의 자아-P씨이다. 소설의 화자가 P씨임이 밝혀지고  문자메세지의 내용이 드러나는 소설의 마지막 부분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아내가 없는 P씨가 자신의 소설 속 세계의 정치적 올바름을 지키려하다가 결국 소설가의 생을 마치고 현실세계, 즉 아내의 위치로 돌아가야만 하는 역설. 현실의 윤리를 픽션의 영역에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이될 수도 있다는 권고처럼 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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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이 위험하게 '사용'될 수 있는 지점은 어떠한 이들이 정치적 올바름의 무용함 혹은 폭력성을 과장함으로써 자신의 잘못을 가리거나 축소할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혹은 SNS 상의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담론이나 텍스트에 대한 비평의 시도 자체를 경시하게끔 만드는 것일 수도 있겠다. 나도 이러한 점들 때문에 읽으면서 조금은 혼란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구병모 작가 본인 또한 이러한 지점에 대한 우려를 인식하여 창작노트의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이 소설이 현재의 혼란이, 나 자신뿐 아니라 어떤 이들에게 혹여 그럴듯하거나 편리한 알리바이로 작용하지는 않기를."


창작노트에 쓴 염원의 문장에도 불구하고 나는 앞서 말한 위험하게 사용될 수 있는 지점들이 꺼림칙하고 그래서 이 소설을 온전히 긍정하고 받아들이긴 힘들다. 하지만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할 때 놓치면 안되는 것들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지점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나에겐 좋은 고민을 안겨준 독서였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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