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방과 탈주 트랜스 소시올로지 2
고병권 지음 / 그린비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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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어떤 책의 서두에 쓰여져 있는 '머리말' 만을 읽고나서 그 책을 선택하게 되었을 때, 
거기서 얻은 어떤 '느낌'을 책을 끝까지 읽어내려가도록 어떠한 지루함이나 실망감 없이 이끌어 갈 수 있다면, 나는 그런 책을 '착한 책'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특정한 누구들로부터는 불온해 보이는 그런 책이 역설적으로 '나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좋은 책'임을 언제부턴가 나도 알게되었다.
그런 면에서 고병권의 <추방과 탈주>는 착하고도, 좋은 책이다.
 
이 리뷰에서는 책에 대한 친절한 소개나 내게 주어졌던 어떤 느낌을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나와 같은 경로로 책을 집어들게 될 그 누군가를 위해 '길 위에서'라는 소제목을 가진 머리말 의 1절과 2절을 옮겨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 책의 저자가 길 위에 몸을 던져 많은 것들을 깨달았듯이, 이 짤막하고 미약한 리뷰 하나로 인해 몸을 던져 책과 만나는 그 누군가가 하나 둘 생기기를 조심스럽게 기대해 본다. 

   
 

1
집의 시대가 가고 부랑의 시대가 온 건가. 존재의 집은 파괴되었다. 존재는 홈리스고, 존재는 노숙한다. 공장이 노동자를 내치고 학교가 학생들을 내치고 농토가 농민들을 내치고 정부가 국민을 내치고 나라가 이방인들을 내치면서, 집은 텅 비고 길은 꽉 찼다. 집과 직장, 정부에 대한 간밤의 꿈은, 새벽 몸서리치며 눈 뜬 곳이 길임을 아는 순간 사라져버렸다.
  우리가 잠깬 곳, 바로 길 위에서 이제 매일의 해가 떠오를 것이다. 집에 대한 그리움으로 눈 뜨기를 거부하는 이가 있다면, 길 위에서의 향수병은 암보다 치명적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제 모두 털고 일어나자. 길에서 먹는 법, 길에서 생각하는 법, 길에서 싸우는 법, 길에서 공부하는 법을 배울 때가 되었다. 이는 그 누구보다도 사유하는 자들에게 하는 말이다. 니체의 말처럼, 이제야말로 '문 밖에서 사유하는 법'을 배울 때이다.

2
이 책의 첫 문장은 2006년 봄에 시작되었다. 어떤 면에서 이 책의 문장들은 내가 썼다기보다 나로부터 뛰쳐나갔다. 지난 2, 3년간 한국 사회 많은 이들이 그랬듯이, 나 역시 어떤 불길한 조짐을 느꼈고, 몸 안 분자들의 난동을 겪으며 길거리로 나갔다. 더 이상 집 안에 있을 수는 없었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사회에서 끊임없이 성장해 온 신자유주의가 숙성을 마치고, 우리 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지난 십여 년간, 네 개의 정부 두 번의 정권교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의 발전과 숙성에는 어떤 단절도 없었다. 단지 그것을 책임지는 관리자들만이 달랐을 뿐이다. 이제우리는 그 숙성의 불행한 결과와 대면하고 있다.
  환자가 덜 아픈 어제를 그리워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병이 어제 이미 시작되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오늘 넘어야 하는 것은 어제 넘어야 했던 그것이다. 현 정부와 저강도 내전상태에 있는 대중들이 지난 정부, 지난 여당에 마음을 주지 않는 이유, 차라리 길거리에서의 머뭇거림을 선택한 이유는, 어제의 증세와 오늘의 증세를 왕복할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대중이 부와 권력의 주변으로 밀려나고, 시간과 공간 그 어느 것도 보장받지 못한 불안한 존재로 전락한 것, 자기 나라 안에서 자기 정부를 잃은 내부난민으로 떠돌기 시작한 것이 과연 오늘의 일인가. 분명히 어제와 오늘은 규모도 다르고 수준도 다르다. 그러나 오늘은 어제가 낳은 야수이고, 오늘은 지난 십 년의 숙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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