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울림 - 다시듣기 : 청춘, 위로, 추억 (3CD)
산울림 노래 / 지니(genie)뮤직 / 2005년 7월
평점 :
품절


그해 여름, 토요일 오후. 내 대학 1학년 자취방을 두드리던 너의 노크소리.
토끼같은 눈망울의 너. 제비꽃같은 보라빛의 너. 고니같은 긴 목의 너.
여름방학 첫날, 집에서 머리감다가 샴푸향기가 너무 좋아서
곧바로 시내버스를 타고 나를 찾아왔다던 너.
빨간색 마이마이 카셋트. 두 갈래로 나뉘어진 이어폰. 내가 선물했던 최인호의 <내 마음의 풍차>.
흰색 면티에 물날린 청바지를 입고 어깨를 살짝 넘는 단발머리. 흰나비. 너.
1학년 1학기 <미학사> 강의실에서 자꾸만 훔쳐봤던 네가
거짓말처럼 나의 방문을 노크해왔던 그해 여름의 토요일. 그 오후.
제라늄화분이 올려져 있던 창가에 기대어 서서,
흰구름 느리게 흘러가는 새파란 하늘 내다보며 함께 들었던 그해 여름의 <산울림>.
김창완의 청아한 보컬. 어쿠어스틱한 신디사이저 밴드가 빛나던
흰색 표지 검은 케이스의 <산울림-골든베스트 vol1>.
'너의 의미''독백''빨간풍선''아마 늦은 여름이었을거야''둘이서'를 함께 듣던 그해 여름의 토요일 오후.
그 방안의 고요. 그 방안의 설렘. 그 방안의 허밍, 너와 나만의.
그때 너는 내 일렁이는 마음을 보았는지.
열어놓은 창문을 낮고 부드럽게 여름바람이 불어올때마다
이마 위 가르마가 살짝 헝클어지면서 금빛으로 빛나던 네 머릿결,
그리고 너에게서 풍겨오던 바다같은 비누향기.
그때 나는 네 두근거리는 가슴까지 들었지.
너와 나는 대학 1학년, 모든 것이 서툴기만 하던, 하필이면
빨간 네 마이마이의 두갈래 이어폰으로 나누어듣던 '너의 의미'와 '둘이서'가
너와 나의 귓속으로 운명처럼 흘러들어올 때, 나는 예감할 수 있었지,
<산울림>이 아주 오랫동안 우리 젊은날의 순결함을 지켜주리라!
 

    시계추를 멈추고 커텐을 내려요,
    화병 속에 밤을 넣어 새장엔 봄날을.
    온갖 것 모두 다 방안에 가득히,
    그리고 둘이서 이렇게 둘이서.
    부드러운 당신 손이 어깨에 따뜻할 때,
    옛얘기처럼 쌓여진 뽀얀 먼지 위로
    은은히 퍼지는 기타소리 들리면
    귓가엔 가느란 당신 숨소리.             - '둘이서' <산울림>

 
끝내 멈추지 않을 인연의 바퀴처럼, <산울림>의 노래들이 몇번이나 되감기면서
너와 나의 귓속으로 파고들어올 때, 창 밖으로 몰려오던 청동빛 구름떼.
동백꽃처럼 떨어지던 노을빛. 그리고 온순한 새떼들처럼 날아오르던 별빛들.
김창완이 '내마음의 주단을 깔고'를 비장하게, 절규하듯 노래부를 때,
<산울림>의 노래가사이기라도 한 듯, 너는 스무살의 서툰 입맞춤을 나에게 해왔지.
그리고 네 가슴은 둥글고 따뜻했지, 알에서 깨어난 한마리 새처럼.
그날, 시내버스 막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너에게 내가 해 줄 수 있었던 것은,
가난한 '토큰'을 사주는 것과, 너의 머리를 뒤로 묶어주는 것 뿐.
- 넌, 머리를 뒤로 묶는 것이 훨씬 더 이뻐.
너는 그날 오후를 우리와 함께 했던 빨간색 마이마이와 <산울림>을 나에게 건넸지.
- 오랫동안 네가 묶어줄거지, 내 머리?
어둠 속에서도 물먹은 별처럼 빛났다, 스무살의 네 뒷모습.
네가 떠나간 버스승강장에, 나는 오랫동안 서 있었다, 그해 여름의 <그건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거야>를 들으며.
 

   꼭 그렇진 않았지만 구름 위에 뜬 기분이었어
   나무사이 그녀 눈동자 신비한 빛을 발하고 있네
   잎새 끝에 매달린 햇살 간지런 바람에 흩어져
   뽀얀 우유빛 숲속은 꿈꾸는 듯 아련했어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꺼야 우리들은 호숫가에 앉았지
   나무처럼 싱그런 그날은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꺼야   -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거야' <산울림>

 

그해 여름, 안개꽃처럼 하얗게 빛나던 밤하늘의 별빛들, 그 빛들의 무덤 사이에,
나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산울림>이라는 별빛을 새겨넣었다.
그리고 그 속에 내 젊은 날의 가장 순결하고 뜨거운 입김하나를, 깊이깊이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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