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소년이 서 있다 민음의 시 149
허연 지음 / 민음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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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명에서 동대구오는 KTX안(10.19).

 
나는 詩集을 읽는다.
차창 밖으로 가을이 단풍하고 있다. 스스로를 비울 줄 아는 자들만이 무르익어, 색(色)을 얻을 수 있다. 나는, 발가벗어 무르익는 가을의 색과 색 사이를, KTX의 속도로, 무자비한 자본의 속도로 가로지른다.  나의 청춘은 끝이 났다. 눈가에는, 색과 색, 풍경과 풍경들이, 바람에 불리우는 모래알처럼, 지나간다,
저기 저, 새들이 무심히 날아간다.
흘러가는 저 모래알들, 풍경들, 시간들!
  

저 풍경들은, 익숙하다.
한때, 빛나는 문장 하나를 얻기위해, 이 길위를 도보고행승처럼 떠돌 때가 있었다. 세상이 하나의 책으로 보였고, 나는 그 책 속의 문장과 문장, 단어와 단어를 갉아먹으며 애벌레처럼 꿈틀거렸다. 그 시절, 하늘을 쳐다보면, 몇 개의 자음과 모음들이, 가창오리떼나 되새떼처럼 무리지어 날으고는 했다. 그 새떼들이 애벌레처럼 꿈틀거리는 나를 쪼아먹어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나도 믿기지 않지만 한두편의 시를 적으며 배고픔을 잊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랬다.  
      나보다 계급이 높은 여자를 훔치듯 시는 부서져 반짝였고, 무슨 넥타이 부대나 
     도둑들보다는 처지가 낫다고 믿었다. 그래서 나는 외로웠다. 
                                                                         - 허연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부분

 지금, 내 옆자리의 사내는, 가볍게 코를 곤다, 나는 그에게 슬쩍 어깨를 건넨다. '당신에게 내 어깨를 드리지요, 기대실테면.'
사내는, 알 수 없는 말들을 중얼거린다. 나는 그 알 수 없는 자음과 모음 쪽으로 몸을 기댄다.
 

창 밖으로, 녹슨 철로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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