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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를 기르다
윤대녕 지음 / 창비 / 2007년 1월
평점 :
우리는 서로에게 결핍이다, 혹은 도달할 수 없는 피안이다.
1.
우리의 삶이란, 제비와 같아서, 우리는 늘 이쪽과 저쪽을 서성인다. 아지랑이 피고 꽃망울 터지는 춘삼월 삼짇날에, '나/ 오늘/ 일상/ 현생/ 찰나'에 生의 보금자리를 트는 우리는, 그러나 여름한철의 녹음이 옅어지고 능금나무에 붉은 실과가 맺히는 가을날이 찾아오면, 운명처럼, 삶의 저쪽, 너/ 어제/ 꿈/ 전생/ 영원에 이끌린다(<연>). 한순간 빛에 노출되고나면 은단(銀丹)알 만한 두개의 붉은 잔광들이 우리의 눈을 잠시 멀게 하는 것처럼, 삶의 저쪽은 물귀신처럼 우리를 매혹시킨다. 우리는 저 너머에서 우리를 이끄는 그 힘에, 순순히 따를 수 밖에 없고, 우리는 삶의 이쪽과 저쪽을 오고갈 수밖에 없다(<제비를 기르다>). 그 부단한 오고감 속에서 우리의 生은, 또 다른 生으로의 부화를 꿈꾸기도 해보지만 끝내 부질없이 소멸해갈 뿐이다(<탱자>). 이것이 우리의 삶이다, 소쇄하고도 소쇄한.
2.
윤대녕의 소설을, 군대에서 만났다. 그해 가을, 아버지로부터 소포가 왔다. 국어사전과 몇권의 시집과 소설집 사이에, 윤대녕의 <은어낚시통신>이 있었다. 책갈피 사이에 아버지의 짧은 메모가 끼워져 있었다.
머지않아 다가올 텁텁한 삶을 맞이할 준비를 해라!
심드렁히 관물대에 던져두었던 <은어낚시통신>은, 불면과 함께 뒤척이던 그해 가을의 어느날, 희미한 내무반 조명등 아래에서 운명처럼 '나의 책'이 되었다. 그날 밤, 윤대녕이 내 심장에 새겨졌다. 감수성어린 문체, 매혹적인 서사, 세상에 대한 허무적 인식. 제대를 하고도 한참동안, 그의 소설들은 나오는 대로, 내 침대 위 손이 잘 닿는 자리에 올려져 있었다. 한 시절, 나는 그에게 들려(憑依)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다 한동안 그의 소설을 읽지 못했다. 그는 지쳐있었고, 때로는 자기아류작들이 눈에 띠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 무렵, 대구에서 馬山으로 내려가는 고속버스 안에서, 그의 산문집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무슨 상징이나 되는 것처럼.
3.
작년 봄, 生의 나른함에 겨워, 그의 <제비를 기르다>(창비)를 샀다. <제비를 기르다><마루밑 이야기>는 읽으면서, 소리내어 울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탱자><고래등><연>을 보다 재미있게 읽었다. 특히, <탱자>는,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에 맞먹는, 보석같은 윤대녕 득의의 작품이다.
내가 <탱자>보다, 울음을 솟게한<제비를 기르다>를 보다 멀리하는 이유는, <탱자>의 새로운 길을 버리고, '은어낚시'시절의 길로 다시 돌아선 작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윤대녕이 <제비를 기르다>에서 신파와 통속을 뒤섞고 있기는 하지만, 별로 문제되지 않는다,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지나치게 설명적이라는 것(묘사적이지 못하다는 것)과, 10여년 동안 계속되어온 그의 소설법에 충실한 구태의연함이다. <탱자><고래등><연>과 같이 보석같은 작품에는, 일체의 거추장스런 설명이 말끔히 걷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생략과 압축, 비약에 따른 삶의 '에피파니'의 현현으로 발광하고 있다. 나는, 그가 <제비를 기르다>나 <못구멍>같은 최근작들의 길보다는, 제주도 시절과 그 언저리에서 쓰여진 <탱자>의 길로 나아가기를 바란다.
그럼에도, <제비를 기르다>는, 아름답다. 통속적으로, 그리고 운명적으로. 특히, 마지막 부분. 어린시절 가출했다가 아버지의 손에 끌려와 벌을 받고 서있던 강화도 술집 '문희'에서 '나'는, 문희라는 술집 작부에게서 여인의 따스함/ 향기로움을 느끼게 되고, 첫사랑으로 마음에 새기게 된다. '나'의 어머니는 늘 제비처럼 집을 떠나 떠돌았으므로, 그리하여 '나'는 여성의 따스함이 항상 결핍으로 남아 있었으므로.('나'에게 결핍된 여성성은, '나'를 가출로 이끌고-가출해서 간 곳이 하필이면 이모댁이라는 것은 '나'에게 결핍된 것이 어머니임을 말해준다, 이모(姨母)는 말그대로 '다른 어머니'이므로-, 다시 나를 여대생 문희에게로 이끈다. '내'가 여대생 문희를 만났을때 그녀가 군대간 남자친구를 면회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여대생 문희에게는, 남성성이 결핍되어있는 것이다. 결핍은 결핍을 낳고, 결핍은 또다른 결핍과 인드라의 그물망 속에서 만난다) 그렇게, '나'는 '문희'를 마음에 품고 세상에 나아가 한시절을 떠돌다가, 사랑에 취하고, 버림받다가, 나이가 들어 옆구리 허전한 生의 쓸쓸함을 안고 '문희'네에 돌아온다. 그 술집은 퇴락할 대로 퇴락했고, 문희는 늙어버릴대로 늙어버렸다. 그녀의 늙음이 서럽고 자신의 삶이 서러운 '나'는, 술에 취해 울음을 운다. 그때 그녀-문희는, 나를 가만히 안아준다, '내 새끼'라며. 生과 세상에 찢겨진 나의 상처를, 가만히 보듬어주고 안아준다. 그녀 '문희'는, 타락한 여성이지만, 그리고 늙어버릴대로 늙어버렸지만, 삶과 세상으로부터 상처받은 '나'를, 대지모(大地母)처럼 안아준다. 신화적이기까지한 이 대목은, 그래서 충분히 통속적이지만, 나는 그 통속이 좋다. 윤대녕의 <제비를 기르다>는, 나의 쓸쓸함을, 삶의 회한을 가만히 안아준다. 군대에서 처음 만나서 첫연정을 느꼈고 잠시 그를 떠날 수 밖에 없었지만, 나는 이내 그에게로 다시 돌아올 수 없었다. 生의 쓸쓸함이 가을처럼 찾아오는 이 시절에, 윤대녕의 작품 속으로 걸어들어가, 강화도 술집 '문희'를 찾아가 술에 취하고 싶다, 그녀 문희에게 가만히 안기고 싶다, 그리고 그 따뜻한 품 속에서, 가만히 울고 싶다.
덧붙임
최근들어 윤대녕의 글을 읽는 맛에 흠뻑 젖어들고 있다. 나이들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정직하게 그려내 보이는 그의 쓸쓸한 문장들을 가만히 읽어가노라면, 거울 속의 내 맨얼굴을 조금은 찬.찬.히. 바라볼 수 있을 것도 같다.